[뉴스토마토 김미애기자] 박근혜 정부 출범과 더불어 재벌 총수들은 유독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각종 경제범죄로 법정에 서는 수모까지 견디어내야 했다. 반성의 눈물과 함께 선처를 호소해야 했고, 이중 일부는 병상 신세를 지기도 했다.
현 정부 들어 첫 재벌 수사로 관심을 모았던 기업은 CJ다. 경제민주화 광풍 속에 '유전무죄무전유죄'의 관행을 끊겠다는 사법부 의지가 천명되면서 관련 그룹 총수들은 두려움에 몸을 사렸다. 이후 효성 등 재벌그룹을 향한 사정당국의 칼날에는 매서운 한기가 불어닥쳤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취임 1년을 맞은 25일, 재계에 온기가 돌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경제활성화를 국정운영의 최우선 목표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특히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에 대한 철폐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 스스로 경제민주화 공약을 후퇴시켰다.
앞서 구자원 LIG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고령과 병력, 특히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 등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으면서 달라진 분위기는 확연해졌다. 덩달아 SK와 CJ 등 총수 재판을 앞둔 그룹들의 기대감도 커졌다. 취임 초기 재계를 떨게 했던 경제민주화 기조는 사라졌다.
◇돌아오는 총수들..관행으로의 회귀
'떠났던 총수'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다. '경제살리기'로 정부가 기조를 틀자 완강했던 사법부의 칼날도 방향을 선회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법리적 판단보다 정무적 판단이 우선하면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바람은 무참히 깨졌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구자원 LIG그룹 회장이 나란히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11일 석방됐다. 김 회장은 파기환송심까지 가는 사투 끝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고, 한화는 환호했다. 특히 구 회장의 경우 사기성 CP 발행으로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됐다는 점에서 법원의 판결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피해액을 보전했고, 경제건설에 기여한 공로가 있고, 건강상태가 악화된 점." 김승연 회장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법원의 참작사유는 과거 사법부가 '재벌 봐주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당시 판결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재벌총수들의 불법과 탈법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시민사회에서 '징역3년에 집행유예5년' 공식이 되살아났다고 꼬집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성명을 내고 "전형적인 재벌 봐주기다. 2012년 대선 이후 기대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 관행 개선이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풀려난 재벌 총수들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2009년 '삼성특검'을 받고 기소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불법 비자금 조성과 횡령 등의 혐의로 2007년 기소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급기야 이 회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1인 단독 사면이라는 초유의 특혜 속에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왼쪽부터)27일 대법원 선고를 앞둔 최태원 SK그룹 회장,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사진=뉴스토마토 DB)
◇최태원 회장 선고 주목..사법부에 촉각
SK와 한화, CJ 등 박 대통령 취임 이후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은 대기업 회장만 10여명에 이르지만, 이달 들어서만 2명의 총수가 풀려났다.
김승연 회장은 2012년 8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 됐지만 그가 실제 수감 생활을 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항소심 재판 도중 건강이 악화돼 구속집행정지를 받은 김 회장은 파기환송심까지 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으며 재판에 임했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남은 데다 김 회장의 건강상태와 여론 등을 고려하면 경영복귀 시점이 단기간에 이뤄지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되지만, 그렇다고 장기간 비워두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간의 공백이 컸던 탓에 몸과 마음을 추스리는 대로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김 회장은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부자가 동시에 수감됐던 LIG그룹도 항소심에서 총수를 되찾았다. 구자원 회장은 1심의 징역 3년 실형 선고를,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 받았다. 유교적 가풍 탓에 상대적으로 오너 리스크에서 자유롭던 범LG가에 유일한 오점으로 남게 됐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지만 진짜 승부는 항소심이다. 검찰의 구형량보다 선고 형량이 낮게 나옴에 따라, 향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CJ는 표면적으로 말을 아끼고 있지만 내심 현재의 유연한 기류가 싫지만은 않은 분위기다.
이제 재계의 시선은 27일로 예정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대법원 선고에 쏠려 있다. 최 회장이 지난해 1월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으면서 재계 3위인 SK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따로 또 같이 3.0'을 통해 계열사 자율경영 체제를 구축했다고는 하나 그의 공백은 분명 아픔이다. 최 회장은 재임 기간 두 번이나 법정 구속되며 사법부와의 악연을 이어갔다.
그러나 최 회장의 이 같은 시련의 끝은 어찌 될 지 미궁이다. 앞선 김승연 회장처럼 파기환송될 지, 아니면 그대로 형이 확정될 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다만 그 결과에 따라 사법부를 향한 논란이 불거질 여지는 충분하다.
경제민주화 광풍과 함께 기소됐던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의 1심 재판은 진행 중이다. 조석래 회장은 세간의 예상을 깨고 고령과 병력 등의 이유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왕성하던 경영활동 뒤로 숨겨온 병력이 무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