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대통령의 말과 '초등생 용어'

입력 : 2014-03-21 오전 10:15:19
지금은 새로 지어졌지만 예전 광화문의 한글 현판을 쓴 주인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살기를 풍긴다'는 평을 들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박정희의 글씨체를 '사령관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국 곳곳에 현판과 비문을 남긴 박정희지만 그의 글씨를 명필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글씨도 그리 보기에 좋은 글씨는 아닌 거 같다. 그렇지만 그의 말투에서는 사령관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규제는 우리가 처부술 원수이자, 암덩어리', '진돗개는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어져 나갈때까지 놓지 않는다', '불타는 애국심으로 경제를 살려라'.
 
이런 전투적인 어법에 대해 언론에선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정책을 밀어부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읽고 있는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눌변에다 준비된 원고가 아니고선 말을 그다지 길게 하지도 않는다.
 
한나라당 대표시절엔 기자들로부터 박 대표가 구사하는 단어는 2백개가 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그가 만든 유행어는 대략 이렇다. 대선때 안보의식이 이렇게나 투철했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쓰인 '전방은 이상없나요'를 비롯해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병걸리셨어요', '나하고 싸우자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하려는 것 아닙니까' 등등.
 
최근엔 '통일은 대박'이란 말이 히트를 쳤다.
 
일각에선 그의 이런 단순어법이 '어려서부터 정제된 언어구사 교육을 받은 때문'으로 풀이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엔 거꾸로 '정제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사실 단순하고 즉자적인 이런 말들이 유명해진 건 9할이 언론의 의미부여 때문이다.
 
고민의 흔적없이 반사적으로 쏟은 것 같은 말들을 언론은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화려하게 의미를 붙이고 초를 친다.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듣고도 안보를 먼저 생각했다'거나, '자신이 피격당했는데도 당의 선거를 먼저 걱정했다'거나, '현직 대통령의 실정을 촌철살인으로 압축해 표현했다'거나.
 
그렇지만 어떻게도 의미부여가 안되는 '병걸리셨어요', '나하고 싸우자는 거예요' 이런 말들은 또 건드리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최근 생활속의 최소한 행동규범을 지켜야 국민 통합이 이뤄진다는 말을 했다. 처음 이말을 듣고는 이게 무슨 뜻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지금도 행동규범을 지키는 것하고 국민통합하고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과문한 필자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말은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주최한 '작은실천 큰보람 운동' 선포식에서 나온 말인데 행사 주최와 행사내용을 연결고리도 없이 다짜고짜 이어붙인 것은 아닌지 추측만 할 뿐이다.
 
자신의 지적수준과 교양을 기반으로 얘기를 쉽게 풀어내는 것과 처음부터 '초딩용어'를 쏟아내는 건 엄연히 다르다. 박 대통령은 어느쪽일까.
 
박 대통령의 어법이 깊은 뜻이 있는 것이든 초딩용어의 대통령적 구현이든 그것 자체로는 큰 문제는 아니다. 그저 네가 맞니 내가 맞니 술자리 안주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인식으로 만드는 '정책'에 있다.
 
대통령이 왜 규제를 원수이자 암으로 생각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모든 규제가 싸그리 암이라는 인식은 박 대통령이 처음인것 같다.
 
문제가 있는 것을 고치는 수준을 넘어 그럼 아예 대상을 없애버리자는 거다.
 
독도가 한일 외교관계 수립에 걸림돌이 되자 박정희가 독도를 폭파해버리고 싶다고 한 얘기가 떠오른다.
 
규제에는 이유가 있다. 필요가 있으면 만들고, 효용이 다하면 없애면 된다.
 
그리고 대개의 규제는 전체의 공익과 일부의 사익이 충돌할 때 공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규제의 문제는 폭파하는게 정답이 아니라 정밀화, 체계화, 시스템화 하는 것이다.
 
규제할 대상을 정확히 짚어내고 임의적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그리고 비리가 끼어들 여지없이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 이게 바로 규제개혁의 요체다.
 
보완하고 다듬어야 할 규제를 폭파해 버린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탐욕에 빠진 미국의 월가가 증명하고 있다. 거기선 자본의 탐욕을 제어할 새로운 규제들이 생겨났다.
 
갑작스레 원수니 암이니 거친 용어를 동원하면서 규제개혁이 국정의 모든 것인양 하는 것을 보니 박 대통령이 관료들이나 규제일소의 이해당사자들로부터 뭔가 얘길 듣긴 들은 모양이다.
 
누구도 모른다는 '창조경제'의 내용을 짜내느라 골머리를 앓긴 하지만, 관료들이나 정책의 이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원하는 바를 입력하는데 가장 만만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아마 MB와 더불어 박 대통령도 첫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이호석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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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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