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중남미 경제를 주름잡던 남미공동시장(MERCOSUR)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1991년 '개방형 지역주의(open regionalism)'를 모토로 뭉쳤던 남미공동시장은 그동안 내부에만 집중한 나머지 경제영토를 확대할 기회를 놓쳤다.
반면, 출범한 지 3년 된 태평양동맹은 몰라보게 성장했다. 중남미 외부 국가들과의 다발적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경제의 외연을 확대했다. 수출과 외부투자는 자연히 따라왔다.
메르코수르가 휘두르던 지휘봉이 태평양동맹에 넘어갈 것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태평양동맹, 92% 상품 무관세 '적용'..FTA 체결 50건 넘어
태평양동맹(Pacific Alliance)은 멕시코, 페루, 칠레, 콜롬비아 4개국을 주축으로 2012년 6월에 출범한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다. 투자와 수출이 늘어난 덕분에 거시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태평양동맹의 이 같은 성장동력은 높은 수준의 개방에 있다.
우선 이 동맹은 서로 간의 관세가 매우 낮다. 대외 개방에 앞서 지역 내 통상 장벽을 철폐하자는 것이다. 지난 2월 태평양동맹 4개국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역내 교역품의 92%에 해당하는 수입 관세를 즉시 없애기로 합의했다. 각국 상품이 원활하게 국경선을 넘나들 수 있게 됐다.
FTA 효과로 외부 권역과의 관세장벽도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회원국 한 곳이 외부와 FTA를 맺으면 동맹국 전체가 협정을 맺은 효과가 나도록 시스템화했기 때문에 FTA로 얻는 혜택은 극대화된다.
또 개별 FTA 체결이 금지된 남미공동시장과 달리 태평양동맹은 회원국이 자유롭게 FTA를 맺을 수 있다. 역내 통합과 대외 개방이 함께 가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그 결과 짧은 시간동안 FTA 체결 건수가 급격하게 뛰었다.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도 논의되고 있다.
◇(왼쪽부터)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주안 마뉴엘 콜롬비아 대통령 산토스,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 오얀타 우말라 페루 대통령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사진=as-coa.org)
태평양동맹이 지금까지 FTA를 체결한 국가는 50개국이 넘는다. 멕시코가 12개, 칠레가 22개, 페루가 15개, 콜롬비아가 12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이 4개국이 중남미에서 차지하는 교역량은 50%에 이르고 규모는 1조1000억달러에 달한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베네수엘라로 구성된 남미공동시장은 그사이 이스라엘,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 3곳과 FTA를 맺는 데 그쳤다.
태평양동맹은 통상분야에 그치지 않고 금융 시장까지 통합하려고 노력 중이다. 회원국 중 칠레, 콜롬비아, 페루는 자본시장을 통합하기 위해 'MILA(Mercado Integrado Latinoamericano)'이란 공동주식시장을 마련했다. 멕시코는 올해 MILA 가입을 목표로 하고 실행 가능성 조사에 들어갔다. 멕시코가 MILA 증시에 합류하면 자본규모는 10조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이처럼 태평양동맹에 관한 희소식이 이어지자 이 동맹에 들어가겠다는 나라들이 길게 줄을 섰다.
코스타리카가 태평양동맹 가입을 요청한 상태다. 과테말라도 가입의사를 곧 표명할 예정이다. 파나마도 가입 의사를 밝혔다. 파나마는 태평양동맹에 입성하려고 지난 3일 멕시코와 FTA를 체결하기도 했다. 리카르도 마르티넬리 대통령은 "멕시코와의 FTA 체결은 태평양동맹에 가입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남미공동시장 회원국인 우루과이마저 태평양동맹에 러브콜을 보냈다. 다닐로 아스토리 우루과이 부통령은 지난 1일 파이낸셜타임즈(FT)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경제동맹에 가입하기를 희망한다"며 "남미공동시장은 도대체 하는 게 없다"고 털어놨다.
◇멕시코 주도의 태평양동맹 '압승'..투자·기업환경 햇살
다른 전문기관과 거시경제 전망 자료를 봐도 우루과이 부통령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어떤 면에서 비교해 봐도 태평양동맹의 압승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태평양동맹은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외국인 투자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 온 것이 주요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 2012년 세계은행(WB)이 매년 발표하는 기업환경평가(Doing Business)에서 태평양동맹은 중남미 국가 중 1~4위를 모두 차지했다.
외국인직접투자(FDI)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12년 태평양동맹에 유입된 자금은 710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FDI 유입액 중남미 1위이자 최대 경제국인 브라질의 650억달러보다 많은 금액이다.
대외 무역에서도 태평양동맹은 남미공동시장에 확연히 앞선다. FT에 따르면 지난해 태평양동맹의 대외 무역비중은 75%를 차지했고 남미공동시장은 7%에 그쳤다. 또 태평양동맹의 국내총생산(GDP) 2조2000억달러 중 무역수지는 무려 1조1000억달러에 달했고 남미공동시장 GDP인 3조1000억달러에서 무역수지는 6530억달러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태평양동맹·남미공동시장 공식 로고 (사진=태평양동맹 홈페이지 )
각 경제동맹을 이끌고 있는 리더 국가의 향후 경제전망을 살펴봐도 태평양의 판정승이 점쳐진다.
태평양동맹의 맹주 멕시코는 브라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최근 들어 성장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자유무역 기조에 힘입어 수출액과 투자규모가 늘었다. 코트라에 따르면 지난 2월 멕시코는 9억7600만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이 기간 수출이 전년동기 대비 4.7% 증가했고 수입은 1.6%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 외부 투자 유치 소식이 잇따라 멕시코 경제에 청신호를 보냈다.
특히, 일본의 멕시코 투자가 엄청나게 확대된 것으로 조사됐다. 멕시코 경제부에 따르면 지난 2010~2013년 11월까지 일본의 대멕시코 투자는 23억달러로 지난 2006~2009년보다 360% 늘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 BMW도 멕시코를 투자 대상국으로 지목했다. BMW는 오는 6월까지 멕시코 과나후아토, 산 루이스 포토시 등 지역에 15~30억달러를 들여 생산공장을 짓기로 했다.
이런 희소식에 화답하듯 글로벌 컨설팅 업체 ISH글로벌인사이트는 오는 2020년이 되면 멕시코가 브라질을 제치고 자동차 생산 6위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전망한 멕시코의 올해 성장률은 3.2%로 지난해의 1.2%를 크게 웃돌았다.
반대로 남미공동시장의 주도국 브라질은 암울한 경제 전망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자산매입 축소 조치인 '테이퍼링'으로 많은 신흥국이 손해를 봤지만, 브라질은 그 중에도 유독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외부 자산이 빠지면서 물가상승률이 6%까지 올라갔고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그러자 지난달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인플레이션 상승 억제에 실패했다며 브라질의 국가 신용등급을 BBB-로 한 단계 강등했다. 지난 8일 IMF는 브라질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의 4.0%에서 1.8%로 하향 조정했다. 무려 2.2%포인트가 빠진 것이다.
◇브라질 주도 남미공동시장..고립주의로 '쇠락'
브라질이 이끄는 남미공동시장이 처음부터 고립주의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지난 1991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주도로 창설된 남미공동시장은 원래 '개방형 자유주의'를 표방했다. 역내 관세동맹을 토대로 대외 자유무역을 추진하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남미에 좌파 지도자들이 대거 집권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자유무역형 경제정책 대신 정부가 관리하는 자립형 정책이 도입된 것이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E
U와의 FTA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메르코프레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남미공동시장이 경제협력보다는 정치적 동지애를 강조하는 공동체로 변질됐다"고 평가했다.
남미공동시장의 정치 편향성은 지난해 좌파 대통령인 페르난도 루고를 탄핵한 파라과이가 회원국 지위를 상실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파라과이가 남긴 자리엔 당시 좌파 성향의 우고 차베스가 이끄는 베네수엘라가 들어왔다.
이처럼 좌경화된 남미공동시장은 역내 정치 이슈에 빠진 나머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경제 부문을 등한시 여기는 우를 범했다. 그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태평양동맹이 발족한 것이다.
FT는 태평양동맹을 이제 막 피어오른 새싹에, 남미공동시장을 시들어가는 식물에 비유하며 남미국들이 태평양동맹의 행보를 관심있기 지켜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쯤되자 브라질 내부에서는 유럽연합(EU)과 미국 등과의 FTA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졌다. 무역적자 폭이 더 커지기 전에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브라질의 지난 1, 2월 무역수지는 61억820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브라질 재계는 FTA를 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 브라질의 44개 대기업으로 이루어진 산업개발연구소(IEDI)는 지난달 보고서를 내고 "세계 경제에서 고립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FTA를 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처럼 남미공동시장의 지역중심주의에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자, 브라질을 비롯한 다른 회원국들은 EU, 중동 등 여러 지역과 FTA협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태평양동맹의 성장세에 고무된 면도 있다. 유럽과의 FTA를 지렛대 삼아 미국과의 FTA 협상을 성사시킨다는 전략도 세웠다.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가 커지면서 EU와의 FTA 협상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크라이나 정정불안으로 EU 밀 곡창지대의 수급이 불안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이 수입하는 EU산 밀이 가격이 올라가면 양측 간의 협상이 어려워질 것이란 분석이다. 브라질의 컨설팅업체 RC는 "브라질은 밀을 많이 수입하기로 유명한 나라"라며 "우크라이나 사태로 유럽산 밀 가격이 올라가면 브라질의 물가는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남미공동시장-EU FTA '기대'..퇴출됐던 파라과이 컴백?
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이 버티고 있는 남미공동시장이 쉽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 늦은 감이 있지만, EU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과의 FTA에 나서면서 경제 살리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악재가 있기는 하지만 EU와의 FTA 협상이 급물살을 탈 것이란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브라질-EU 정상회담장에 서 있다. (사진=유럽보이스)
브라질의 일간지 폴랴데 상파울루에 따르면 오는 12월까지 브라질은 두 블록 간 수입 관세를 철폐할 수 있는 항목을 제시할 계획이다. 그 내용이 EU의 기준선에 부합하면 15년간 성과없이 맴돌던 협상에 활로가 트일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탄핵사건으로 퇴출당했던 파라과이가 돌아올 것이란 소식 또한 남미공동체에 힘을 실어준다. 국제무역연구원은 파라과이가 남미공동체에 재가입 하려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전했다. 볼리비아도 남미공동체 가입을 추진 중이고 에콰도르는 검토 단계에 있다. 이들이 합류하면 남미공동체는 덩치를 더 키우는 동시에 활력을 되찾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투자 환경이 좋고 거시경제 전망도 긍정적인 태평양동맹이 엄청난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 남미공동시장이 세계 시장에 얼마나 어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태평양동맹도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수출이 증가하는 등 대외적인 실익은 확실히 챙겼으나, 동맹국간 거래량은 미비한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기준 태평양 동맹국간의 교역 비중은 전체 무역의 3.9%에 불과하다. 서로간의 상품이 겹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태평양동맹 회원국간의 자유로운 인력이동과 에너지, 환경, 지리적 부문의 통합이 중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상품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안토니 에스테바데오르달 미주개발은행 수석연구원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평양동맹은 원산지 표기를 비롯한 법 규정을 서로 맞추고 있다"며 "스파게티볼 효과로 인한 문제점도 해결해 나가고 있어 다른 지역의 경제 모델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파게티볼 효과(spaghetti bowl effect)는 여러 국가와 FTA를 동시다발적으로 체결할 때 복잡한 절차와 규정으로 FTA 효과가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