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힘 있는 자들이 게임의 법칙을 바꾸려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 불안감을 털어낸 선진국들이 세계 무대로 뛰어들면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경제 규범들이 성립될 태세다.
미국, 중국, EU, 일본과 같은 경제 대국들은 중소 국들과의 협력을 이어가면서도 비슷한 규모의 선진국과 경제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선진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관세율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투자, 서비스, 고용, 지적재산권 등 모든 분야에서 큰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美·日 전통의 우방 FTA 체결 '노력'..5대 성역 '난제'
선진국들이 경제영토를 늘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FTA를 체결하고 있다.
비슷한 규모의 국가와 FTA를 하면 넓은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많은 수의 일자리도 창출 할 수 있다. 선진국이 직면한 저성장과 저고용이란 2대 악재가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다른 방식보다 유독 FTA에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전 세계를 아우르는 무역질서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각국 들은 개별 통상조약에 집중하게 됐다.
우루과이라운드는 지난 1995년에 세계무역기구(WTO)를 만들어낸 다자간 무역협상이다. 이후 각국 들은 WTO의 뒤를 이어 다자간 무역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를 추진하고 있으나, 이는 현재 표류 중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의견차 때문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부어야 할 판국에 그 부대를 바꾸는 작업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최근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도 "새로운 무역 협상을 통해 성장을 더욱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며 "도하개발어젠다 진행에도 속도를 내줄 것"을 당부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핵 정상회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로이터통신)
이런 가운데 미국이 먼저 치고 나왔다. 미국은 무엇보다 일본과 캐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 TPP)' 협상에 공을 들이고 있다. 낮은 관세 효과로 수출을 늘리고 고용은 확대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중국 견제 효과도 볼 수 있다.
미국 무역 당국은 그 중 TPP만 성사되면 미국 내 근로자 임금이 2230억달러 늘어나고 수출이 1240억달러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 또 많은 수의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본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과 FTA 협상을 매듭짓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일본과 FTA를 체결하면 그 자체로도 득이지만, TPP 또한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일본을 잡으면 다른 TPP 회원국과 좀 더 수월하게 협상을 할 여지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FTA 협상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양측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어서다. 지난 15일 오에 히로시 일본 TPP 본부장은 워싱턴에서 열린 TPP 회의를 마치고 "조금씩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의견차가 크다"고 토로했다.
일본은 '성역'으로 여겨지는 쌀, 밀, 설탕, 육류, 유제품의 수입 관세를 미국의 요구대로 낮출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쇠고기 관세의 경우 일본은 현행 38.5%에서 20%대로 낮추길 바라고 미국은 10% 이하를 원한다.
이 때문에 양측 정상은 딜레마에 빠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경제성장과 중국견제를 위해 TPP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과의 FTA를 꼭 성사시켜야만 하는데 그렇다고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면 TPP의 장점인 높은 자유도가 사라진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아베노믹스'를 필두로 한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미국과의 FTA를 따내야 한다. 자동차와 IT 부품 등을 미국 시장에 팔면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오는 24일에 열리는 미·일 양국 간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찾을지 미지수다.
◇中, 각종 FTA 협상 가속화..투자·고용 연계, 신개념 조항
중국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견제와는 별도로 지난해 출범한 시진핑(사진) 정부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와 자원중심으로 거래했던 관행을 깨고 경제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아이슬란드, 스위스와 FTA를 체결한 중국은 이제 호주와의 FTA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 RCEP)', 한·중·일 FTA, 걸프협력회의(GCC)와의 FTA까지 바라보고 있다.
중국은 TPP 방어책인 RCEP를 서서히 진행하는 한편, 호주와의 FTA에 포커스를 맞췄다. 중국의 넘치는 위안화와 호주의 개발 프로그램이 만나면 양측에 엄청난 이득을 안겨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중·호주 FTA 협정도 미·일 FTA 못지않게 논란이 많다.
바로 중국이 요구한 인력 이민 탓이다. 중국은 위안화가 투입되는 호주 개발 프로그램에 중국 인력이 패키지로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투자에 고용이 연동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아프리카 국가들과 거래할 때 집어넣던 조항인데, 이는 FTA 역사상 전례가 없는 조항이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과의 FTA에도 중국이 이 같은 조건을 요구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의 주장은 이렇다. 필요한 곳에 투자해줄 테니 그 사업에 고용되는 중국 인력 상대로는 취업비자 취득 조건을 낮추거나 없애라는 것이다. 원래 외국인이 호주에서 일하려면 국적을 막론하고 475취업비자를 받아야 한다. 이를 취득하기 위해선 영어 기본실력과 호주 현지인 수준의 임금이 보장되야 하는데 중국은 FTA에 이런 기준을 없애는 특혜 조항을 넣자고 요구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호주 정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다. FTA 체결 목적인 성장과 고용창출 중 하나를 버리라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투자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호주 현지 근로자들이 반발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호주이민협회(Migration council Australia)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민협회측은 "호주 정부가 중국 근로자들에게 특권을 주면 사회통합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것"이라고 밝혔다.
칼라 윌셔 호주이민협회 대표는 "한 나라에 비자 특혜를 주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기는 것"이라며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이며 호주가 추구하는 비차별 주의와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호주의 역점 사업인 농업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와 지방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중국의 돈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더구나 지난해 9월 총리에 오른 토니 애벗은 임기 초에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토니 애벗 총리가 중국의 요구에 확실한 반대가 아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도 그가 처한 애매한 상황을 보여준다.
토니 애벗은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호주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Foreign Investment Review Board)의 심의 규정을 재고해 볼 것"이라며 "수정할 수 있는 조항이 없는지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중국과의 FTA로 약간의 고용손실을 입을 수 있겠지만, 전체로 보면 실보다 득이 크다고 주장했다. 퀸즐랜드주에서 근무하는 부르스 스콧 지방의원은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늘리기 위해 중국 투자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日·EU FTA 체결에 농업 걸림돌..美·EU FTA도 '삐걱'
일본 정부는 오는 2018년까지 무역자유화 추격, 농업경쟁력 강화 등을 모토로 내걸었다. 이를 위해 다방면에 걸친 FTA를 통해 무역 비중을 현재 19%에서 70%로 늘릴 방침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FTA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최근에 성사시킨 호주와의 FTA를 기반으로 EU와의 협상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농업 부문이 걸린다. 일본은 EU와의 FTA에서도 농업 부문 개방을 매우 꺼리고 있다. 자국 농업을 보호한다는 논리에서다. 문제는 EU에도 농업 부문은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란 점이다.
특히나 피자와 파스타의 나라 이탈리아는 일본의 요구에 반대하고 있다. 지난 일 년 간 진행된 5차례의 협상이 별다른 진전없이 무산된 이유다. EU와의 FTA에서는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의 권고보다 EU 각 회원국의 동의가 더 중요하다. 일본은 또 강점 분야인 자동차, IT 부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없애라고 요구한다.
반대로 EU는 일본에 와인 관세를 없애라고 촉구하고 있다. 와인 강국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개별 회원국 들이 자국 주력산업 보호를 이유로 관련 수입 관세 인하를 요구하고 있어 EU·일 FTA 협상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EU-일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 위원들을
상대로 사업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통신)
이런 가운데 EU와 미국의 FTA 협상은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두고 EU와 러시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미·EU FTA가 재부각된 것이다. 미·EU가 체결되면 셰일가스 혁명으로 넘쳐나는 미국의 에너지가 EU에 공급될 수 있다. EU의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낮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양측 간의 보호규정 격차가 심해 이 협상이 역시 지연되고 있다. 그럼에도 양 진영이 하나로 이어지면 인구 8억명을 아우르는 거대 시장이 형성되고 4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수있어 관련 당국자들은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한편, 전문가들은 미국, EU 등 내로라하는 세계 경제국들이 FTA로 맺어지면 다른 권역의 FTA 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제무역연구원은 "미국과 EU가 FTA 협상을 통해 규정을 통일하고 환경기준까지 도출하면 양대 경제권에 제품을 수출하려는 다른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