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포탈과 횡령·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1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자신의 첫재판에 출석하고 있다.ⓒNews1
[뉴스토마토 양지윤기자] 16일 오전 9시40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서관 입구.
첫 재판에 출석하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은 "혐의 내용을 인정하냐"는 기자들 질문에 침묵한 뒤 느린 발걸음으로 법정을 향했다.
조 회장은 오른쪽 손은 지팡이를 꽉 쥐고, 맞은 편 손으로는 직원의 부축을 받아 서 있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나빠보였다. 예전의 정력은 찾기 힘들었다. 힘든 노구였다.
조 회장이 지법으로 들어선 직후 사건에 관계된 임원들도 속속 재판장에 도착했다. 조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사장과 삼남 조현상 부사장, 이상운 부회장 등 총수 일가를 비롯한 최고경영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법정으로 올라갔다. 세 사람 모두 재판을 앞두고 굳은 표정으로,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형사28부(재판장 김종호) 심리로 진행된 이날 재판에는 효성그룹 법무팀과 홍보팀, 취재진 등 총 60여명이 참석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509호 법정은 방청석 좌석이 40여개에 불과해 일부 취재진과 관계자들은 선 채로 재판을 지켜봐야 할 만큼 1차 공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특히 공판 시작 시간 무렵부터 찜통 더위가 찾아오면서 재판정은 금새 후끈 달아올랐다.
조석래 회장 측은 이날 오전 공판에서 검찰이 제기한 혐의 내용을 모두 부인했다. 조 회장 측은 회계분식 및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일"이라며 그간의 재계 관행을 이유로 불가항력이었음을 주장했다.
이어 "주주와 금융기관, 국민경제에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며 "회사재산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지도 않아 다른 대기업의 횡령 범죄와는 성격도 다르다"고 항변했다. 또 "공소사실 대부분이 이미 6~7년 전에 마무리 된 사안"이라면서 "2400억원이 넘는 세금을 모두 납부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변호인은 효성그룹이 부실회사인 효성물산을 합병한 사례를 들며 "당시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고, 현재의 잣대로 모든 일을 재단할 수 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다른 금융기관들의 연쇄 부실을 우려한 금융당국이 독자생존이 불가능한 효성물산의 법정관리를 막아 결국 효성T&C가 효성물산과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등 3개 회사 합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게 효성 측의 해명이다.
아울러 변호인은 이후 발생한 분식회계와 관련해 "합병 당시 부실을 공개하고, 처리했더라면 회사가 문을 닫았을 것"이라면서 당시 상황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이어 "회계 장부를 통해 부실을 숨기는 것은 법적, 도적적으로 잘못했던 일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사과한다. 다만 고뇌에 찬 경영상 판단이므로 이를 나무랄 수만은 없을 거라고 본다"면서 15년 전 경영상의 결정임을 강조하며 선처를 호소했다.
조 회장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주식 거래로 얻은 이득을 감추고 세금을 내지 않은 것과 관련해서는 "효성그룹 소유의 회사로서 개인회사가 아니라 법인세 부과 대상"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조 회장이 차명으로 주식을 보유해 종합소득세와 양도세를 내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보유한 것으로 조세포탈의 의도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사실상 검찰이 공소장에 기재한 혐의 내용 대부분을 부정한 것.
조 회장은 법정에서 혐의와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없다"고 짧게 답했다. 조 회장과 함께 기소된 장남 조현준 효성그룹 사장(45)도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
조 회장은 오전 공판 중 "건강에 문제가 있을 경우 곧바로 변호인을 통해 알려 달라"는 재판부의 주문에, 일어서서 "감사하다. 최선을 다해 재판에 임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조 회장은 재판 내내 지팡이를 쥔 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있는가 하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러다 변호인단의 주요 발언이 이어지는 순간 눈을 떠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보여주는 스크린을 주시하기도 했다.
이번 재판에 기소되지 않은 조현상 부사장은 방청석에서 아버지와 형의 공판을 차분히 지켜보는 가운데, 법정에서 오간 내용을 꼼꼼히 메모했다. 조 부사장은 오후 2시에 속개된 재판에도 참석해 양측의 공방을 지켜보며, 관련 내용을 기록했다.
재판부는 앞으로 매주 월요일 재판을 열어 사건을 들여다 볼 계획이다. 앞으로 4차례 정도 재판에서는 서증조사가 진행된다.
앞서 조 회장은 특가법상 조세포탈과 특경가법상 배임·횡령, 상법 및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으나, 법원이 이를 기각해 불구속 기소됐다.
경영상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혐의가 총 망라됐지만 법원은 "주요 범죄 혐의에 관한 소명 정도, 피의자의 연령과 병력 등을 감안하면 구속수사의 필요성이나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범죄 액수는 분식회계 5000억여원, 탈세 1500억여원, 횡령 690억여원, 배임 230억여원, 위법 배당 500억여원 등 총 8000여억원이다.
조 사장은 사적으로 사용한 신용카드 대금 16억원을 효성 법인자금으로 결제해 횡령하고,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주식을 매매해 세금 110억원을 탈루한 혐의 등으로 함께 기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