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승근기자] "기업을 위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자기 배 불리기에 바쁜 것 같다. 아무리 채권단이 '갑'이라고 하지만 이건 도가 너무 지나치다."
채권단 주도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기업들의 불만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기업 회생을 위한 궁여지책이라고는 하나 해당 기업에 대한 채권단의 요구와 압박이 거세지면서 '을'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다.
특히 조선, 철강, 해운 등 최근 수년간 업황 침체로 재무 위험을 겪고 있는 업종들은 알짜자산은 물론, 경영권과 관계된 지분 매각 등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으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선제적인 유동성 확보를 통해 리스크를 줄인다는 필요성은 동의하지만 향후 성장 동력까지 정리하라는 채권단의 요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구조조정 기업들 사이에서는 채권단이 구조조정을 통한 기업 회생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구조조정 성과를 원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대상으로 선정된 금호아시아나, 대성, 대우건설, 동국제강, 동부, 성동조선, 한라, 한진, 한진중공업, 현대, 현대산업개발, SPP조선, STX, STX조선해양 등 14개사는 산업은행 등 주채권은행과 약정 체결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중 이미 워크아웃이나 자율협약을 체결한 금호아시아나, 성동조선, SPP조선, STX, STX조선해양 등을 제외한 나머지 9개 대기업이 새로 약정을 체결한다.
이중 동부그룹만 아직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동부그룹은 지난해 11월 동부하이텍, 동부메탈, 동부제철 인천공장, 동부 발전당진, 동부익스프레스 등 주요 계열사 매각 등을 통해 3조원의 유동성을 확보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부하이텍과 동부제철 인천공장, 동부 발전당진 등 동부 패키지의 매각 작업이 지지부진하면서 동부그룹 구조조정 계획 전체에 차질을 빚고 있다.
동부하이텍의 경우 SK, LG그룹 등 국내 대기업이 나서지 않은 것으로 전해져 높은 인수가격을 예상하기 어렵고, 동부 패키지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인수를 제의받은 포스코의 시간끌기 전략으로 애를 먹고 있다.
그러자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에 이어 장남인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이 보유한 동부화재 지분(13.29%)을 담보로 제공하라고 요구하며 압박에 나섰다. 앞서 김준기 회장의 사재출연 요구에 이어 압박의 강도를 높인 것이다.
동부 패키지의 경우 동부그룹과 포스코 간 가격 격차가 문제인 만큼 동부그룹을 압박해 가격 차이를 줄이고 패키지 딜을 마무리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곧 헐값 매각 논란을 낳았다.
이에 동부 측에서는 수백억원대 담보 대출을 위해 시가총액 4조원대 기업의 경영권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김남호 부장은 현재 동부화재 최대주주로, 이 지분은 동부화재 경영권을 의미한다.
아울러 동부 패키지 매각 작업에 있어서도 당초 동부그룹은 경쟁입찰과 인천공장, 동부 발전당진의 개별 매각을 요구했지만 빠른 매각을 위해 산업은행이 이를 묵살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특히 동부 측이 포스코에만 인수를 제안할 경우 향후 배임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산업은행 설득에 나섰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산 매각의 주요 목적이 유동성 확보인 만큼 경쟁입찰을 통해 제 값을 받는 것이 유리하지만 동부제철 인천공장과 동부 발전당진을 한 데 묶어 파는 것도 모자라 포스코 한 곳에만 인수를 제의한 것도 일반적인 시장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게 동부 측 지적이다.
산업은행이 포스코에 동부 패키지 인수를 제안하면서 총 인수금액의 20~30% 정도만 부담하면 공장의 경영권과 동부발전당진의 우선인수협상권을 주겠다는 조건을 포함시킨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인수 제안을 받은 포스코의 결정이 계속 미뤄지면서 동부 패키지 매각 작업이 늦춰지고 있는 상황이다. 최악의 경우 동부 패키지 매각작업이 무산되면 이를 주도한 산업은행은 잘못된 판단으로 구조조정 작업을 지연시켰다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동국제강은 지난 9일 페럼타워 매각설로 곤혹을 치렀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과의 재무구조개선 약정 협약을 맺는 과정에서 선제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채권단에서 언급한 내용이 기정사실처럼 확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동국제강은 페럼타워 매각설로 인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최근 18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했음에도 자금사정이 얼마나 좋지 않기에 본사 건물까지 매각해야 하느냐는 시장의 우려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결국 당일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제15회 철의 날' 기념식 직후 장세주 회장이 "현재 동국제강은 유동성 문제가 없다"며 "본사 매각은 너무 앞서나간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나서야 매각설은 잦아들었다.
업계에서는 기업 회생에 도움을 줘야 할 채권단이 자기 잇속을 채우기 위해 희망사항을 무작정 시장에 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채권단 입장에서는 기업이 최대한 많은 자산을 매각하고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 위험부담 축소에 유리하지만 무조건적인 자산 매각은 결코 기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업황 침체로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이 늘면서 채권단의 입지가 크게 강화됐다"며 "일부의 경우 채권단이 기업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흔드는 사례가 있는데 압박을 위한 압박은 기업에도 채권단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침을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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