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애신기자] "스마트폰 전문업체인 HTC가 한국 시장에서 제대로 기를 못 펴고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아직 스마트폰 출시는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HTC의 그늘이 짙다. 최근 외산폰이 다시 국내 진출을 타진 중이지만 여전히 진출을 꺼리는 기업들이 많다.
대만 제조사 관계자는 "PC나 태블릿이면 모를까, 본사에서는 한국 시장에 스마트폰을 출시하는 것에 대해 아예 고려조차 하고 있지 않다"며 "HTC의 여파가 크다"고 말했다.
대만 제조사인 HTC는 지난 2009년 1월 한국법인을 설립한 후 3년6개월여 만에 철수했다. 한국에서 스마트폰의 99%가
삼성전자(005930)와
LG전자(066570)·팬택 등 국내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어, 이 같은 독과점 구조에서는 더 이상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HTC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시장=외산폰 무덤'이라는 공식이 생길 정도로 국내 시장은 외산 제조사들에게 불모지와 다름 없다.
같은 해 미국 휴대폰 제조사 모토로라도 국내 시장을 포기했고, 소니의 스마트폰 사업을 담당하는 소니모바일커뮤니케이션즈는 소니코리아로 축소 개편됐다. 핀란드의 노키아는 국내에서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사라졌으며, 블랙베리도 자취를 감췄다.
스마트폰의 원조로, 두둑한 마니아층을 확보한 애플의 '아이폰'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국내에서 외산폰을 찾기는 힘든 실정이다.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다시 국내시장을 노크하는 기업들도 있다. 스마트폰 보급률과 교체주기 등은 여전히 공급자 입장에서 매력적인 데다, 세계시장의 바로미터인 한국에서 무작정 물러서기에는 자존심도 용납지 않는다.
◇(왼쪽부터)소니의 '엑스페리아Z2'와 에이서의 'Z150-리퀴드 Z5'(사진=각사)
소니가 전략 스마트폰 '엑스페리아Z2'를 출시한 데 이어 대만 PC전문업체 에이서도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대만PC 전문업체 에이수스도 전화 통화를 지원하는 태블릿을 내놨다.
환경적 변화도 있다. 무엇보다 알뜰폰 사업자들이 외산폰 출시에 적극적이다.
티플러스가 중국 제조업체 ZTE의 'Z폰'과 'ME폰', UTCOM의 'UT폴더폰'을 판매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사업자들도 노키아·HTC 등과 제품 공급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제품 대비 중저가의 제품을 통해 통신시장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업계 관계자는 "고가의 프리미엄 스마트폰은 냉장고나 세탁기에 맞먹는 가격임에도 국내 수요가 높았다"면서 "통상 2년이면 배터리 수명이 줄고 잔고장이 많아지기 때문에 최근에는 스마트폰에 많은 비용을 들일 필요성이 없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 출시된 외산폰은 대부분 저가 정책을 펼치고 있다. 에이서의 'Z150-리퀴드 Z5'는 25만9600원이다. 소니의 엑스페리아Z2는 최신 기능을 갖춘 프리미엄 스마트폰임에도 70만원대로, '갤럭시S5', 'LG G3' 등 경쟁작보다 저렴하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스마트폰 사용율이 가장 높지만 소비자의 스마트폰 선택권은 가장 좁다는 오명 아닌 오명을 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삼성과 애플·LG·팬택 뿐 아니라 다른 제조사의 제품으로 폭이 넓어지자 소비자들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박희진 씨는 "최신 스마트폰을 사더라도 전 모델에서 약간 업그레이드 된 수준이라서 싫증이 났다"며 "요즘에는 아예 새로운 해외 제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출시된 엑스페리아Z2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SK텔레콤(017670)과
KT(030200)를 통해 예약판매를 진행한 엑스페리아Z2는 1차 예약판매 물량 1000대가 1시간 만에 완판됐다. 소니 관계자는 "제품을 소량씩 들여오고 있는데 물량이 들어올 때마다 전부 소진되고 있다"고 전했다.
◇LG G3를 만지고 있는 모습(사진=뉴스토마토)
하지만 국내에 출시된 외산폰은 여전히 핸디캡을 떠안고 있다. 무엇보다 통신 네크워크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국은 통신기술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화하는 곳이다. 세계 최초로 롱텀에볼루션(LTE) 서비스가 도입된 데 이어 최근에는 LTE보다 3배 더 빠른 광대역 LTE-A가 도입됐다.
국내 제조사들은 이통사와의 협업체제가 갖춰진 덕에 통신기술의 변화에 발맞춰 제품을 개발하고 있지만, 외산업체들의 경우 급변하는 통신기술을 따라잡기 쉽지 않은 데다 한국시장을 위한 버전을 따로 구축해야 하는 고충도 있다.
최근 소니가 출시한 '엑스페리아Z2'에 통화 끊김 현상이 발생한다는 지적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소니 관계자는 "한국전파인증협회로부터 문제 없다고 인증을 받았음에도 일부 민감도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소니 제품은 국내 제조사와 다르게 일본에서 개발이 이뤄지다 보니 통신환경 등이 최적화 돼 있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해명했다.
지난 12일 KT를 통해 국내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 에이서도 3G 전용 스마트폰 'Z150-리퀴드 Z5'를 출시했다. 국내에서 LTE가 대세인 점을 감안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아울러 국내 휴대폰 유통구조도 해외 제조사들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다. 통상 제조사가 이통사에 단말기 판매를 지원하는 장려금을 지급하고, 이통사는 소비자에게 단말기를 교체하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통사들이 흥행할 것 같은 제품에 보조금을 몰아주는 탓에 외산폰들은 설 곳이 없다. 또 휴대폰 대리점이나 판매점에서도 보조금이 집중된 제품을 적극 권하고 있다. 소니가 엑스페리아Z2를 이통사 없이 제조사 단독으로 단말기를 출시하는 자급제 방식을 택한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국내시장은 외산폰이 진입하기에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이기 때문에 해외 제조사들의 고민이 많을 것"이라면서 "일부 소비자들로부터 외산폰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 때문에 미약하게나마 시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