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지인들에게 "이정현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하나 같이 새끼손가락을 입으로 갖다댄다. 혜성같이 등장한 이정현이 알려졌을 때가 세기말 1999년. 벌써 15년이 지났음에도 당시 이정현의 퍼포먼스는 여전히 인상이 깊다.
매번 팔색조 같은 콘셉트로 가수로서 승승장구를 하던 이정현은 우연한 계기로 중국에 진출, 중국에서 여신으로 불리는 등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다. 게다가 영화 <꽃잎> 등 다양한 영화를 통해 쌓은 연기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드라마에도 나서고 있다.
하지만 중국무대에 열을 올려서일까. 최근 국내에서의 활동은 미비했다. 2년 전 저예산 영화 <범죄소년>만이 그의 최신 필모그래피이다. 그런 그가 개봉과 함께 신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는 영화 <명량>에 출연했다. 비록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두려움이 용기로 바꾸는데 포문을 여는 임팩트가 강한 정씨여인이다.
특히 앞부분 남편을 만나러 물길을 헤쳐가는 정씨여인의 표정은 일품이었다. 남편을 보내기 싫은, 가슴아픈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연기가 정말 좋았다"고 말하니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데뷔 15년차, 거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정현에게 있어 <명량>은 첫 상업영화나 다름 없다. 대부분의 작품이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였다. 이 때문에 감회가 새롭다는 이정현을 지난달 29일 만났다. 벌써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인데도 피부가 뽀얗고, 한국의 바비인형다운 이미지는 여전했다. 5녀 중 막내인 그가 틈틈히 보여준 애교는 인터뷰어에게 큰 기운을 안겨줬다.
◇이정현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김한민 감독의 영화..불러주면 또 할거야"
여배우가 설 자리가 얼마 없다는 말이 너무도 맞다. 여름 극장가 4대 대작중 홍일점이 세 작품이나 된다. <군도:민란의 시대>의 윤지혜, <해무>의 한예리, 그리고 <명량>의 이정현이다. 그만큼 여배우가 뛰어들 캐릭터가 적다.
정씨여인을 맡은 것을 천운이라고 말하는 그. 김한민 감독에 대한 고마움이 커보였다.
"김 감독님께서 <최종병기 활> 촬영 중일 때 영화 <파란만장>을 보셨대요. 박찬욱, 박찬경 감독님 작품인데, 제가 무당으로 나왔거든요. 저를 한 번 보시고 싶다고 하셔서 만났는데, '다음에 한 번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의례적인 말이라 생각했는데, <명량>에 불러주셨어요."
솔로가수로서 국내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다. 비록 저예산 작품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었다. 이름값에 비해서는 적은 분량이다. 아쉬움이 전혀 없었을까 궁금했다.
이정현은 "여자 주인공이어도 의미없는 역할이 많은데,정씨여인은 임팩트가 있잖아요. 남편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아낙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야 되고, 두려움이 용기로 바뀌는 순간, 중심에 있는 인물이잖아요. 분량은 신경쓰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는 말투였다. 그러면서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미소가 번진 이유는 동료 배우들과의 추억 때문이었다. 사실 영화를 보면 이정현이 다른 배우들과 만나는 장면은 거의 없다. 남편 임준영 역의 진구가 유일하다. "최민식, 류승룡, 조진웅 같은 좋은 배우들과 함께 하는 작품에 들어간 것도 영광이었다"고 말했지만, 이정현은 촬영장에서 이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촬영 없는 날 촬영현장에 많이 갔어요. 먹을 것 싸들고요.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조선 진영은 늘 조용하고 엄숙하고, 긴장감이 맴돌아요. 특히 최민식 오빠는 늘 감정이 깊게 잡혀있었어요. 인사드리기도 힘들 정도로. 반대로 일본 진영은 늘 시끄러워요. 승룡 오빠나 진웅 오빠 모두 술도 좋아하고 말도 잘하잖아요. 엄청 떠들고 신나게 놀다 왔던 기억이 나요."
추위 때문에 고생했고, 영화 현장의 부담감 때문에 힘들었다. 하지만 좋은 추억이 많다. 그렇기에 이정현은 또 한 번의 제안이 오면 덮석 받을 생각이다.
"감독님이 이순신 시리즈를 만드신다고 하는데, 또 제안이 오면 무조건 해야죠. 안 할 이유가 없어요. 또 이 영화를 계기로 더 많은 상업영화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이정현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중국에서도 말조심해야 돼요"
많이 알려진대로 이정현이 중국에 가게된 배경은 조금 독특하다. 중화권 가수가 이정현의 노래 <바꿔>를 그대로 표절했다. 노래는 물론 동양적인 의상에 새끼손가락에 마이크를 낀 것까지 똑같았다. 그 노래가 중화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표절인 것을 안 중국인들이 오리지날 가수인 이정현을 원했다. 그렇게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러다 말겠지"했던 중국에서의 인기는 중국가수들 덕에 이어졌다. 여러 가수들이 이정현의 노래를 따라 불렀고 7곡 이상의 노래가 히트했다. 중국에서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는 이유가 됐다.
"중국 가수들 때문에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거라서 소송도 안하기로 했다"며 웃음을 보이는 이정현이다.
"계속 찾아줬어요. 중국에서는 주로 공연이나 행사가 많아요. 그래서 거의 갈 때마다 여행가는 느낌이에요."
최근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안방을 휩쓸면서 한류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업계에서는 일부 배우들을 두고 "너무 돈만 밝히면서 중국에 간다"며 중국이 한국에 등을 돌릴까봐 걱정하고 있다.
오랜기간 중국에서 활약한 이정현이 차기 한류스타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은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최근 들어 시진핑 주석도 내한하고, 한중합작 작품도 늘어나는 것 같아요. 각국에서 지원도 많이 하고요. 중국스타들도 한국에 진출하고, 서로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중국에 대한 시각이에요. 정말 무섭게 성장하고 있거든요. 1년 1년이 달라요. '중국은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돼요. 중국사람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자존심이 세거든요. 특히 말조심해야돼요. '중국은 돈 벌러 가는 곳'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돼요. 중국사람들도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저희도 중국에서 스케줄이 들어오면 일일이 하나하나 다 체크해요. 꼼꼼하고 신중해야돼요."
조곤조곤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꺼냈다. 한국스타들이 계속해서 중국에 진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엿보였다.
독특한 콘셉트의 신인부터 중국진출, 저예산 영화 등 스토리가 독특한 이정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남다른 이정현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물어봤다. 답은 연기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연기가 편해지고 좋아요. 무대는 굵고 짧고 강렬한 반면에 연기는 얇고 깊은 것 같아요. 긴시간을 필요로하는데, 그 깊이가 더 마음을 건드려요. 앞으로도 영화 연기자로 더 많이 보여드리고 싶어요."
<명량>이 끝난 뒤 오는 9월에서 10월쯤에는 그가 출연한 저예산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꽃잎>, <파란만장> 등에서 인연을 맺은 박찬욱 감독의 추천작이면서 타이틀롤이다.
사실 역할이 작아 연기를 많이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아무래도 이순신을 조명하는 영화다 보니 스포트라이트가 이순신에게 쏠린다. 깊이 있게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에 마음에 남았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때 또 봐요"라고 하니 "꼭 보자"며 웃는다. 그 미소 때문이라도 인터뷰를 꼭 한 번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