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충희기자] 현대차그룹이 서울 영동대로 한국전력 본사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매입하기로 하면서 거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번 입찰에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한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이사회 의사록 열람을 청구하고 나섰고,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정몽구 회장과 각 사의 이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배임혐의까지 적용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번 입찰에 대해 시민사회는 물론 재계와 금융권 등 경제계 전문가들조차 어처구니 없어 하는 이유는, 현대차가 감정가 3배 이상의 천문학적 금액을 투입하는 무리수를 뒀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한전 부지 매입 의사를 희망해온 재계 1위 삼성이 이번에 써낸 응찰가도 6조원 아래인 것으로 전해졌다.
시장은 곧바로 우려를 나타냈다. 지난 18일 부지 입찰 금액이 전해진 직후부터 24일 종가 기준까지 현대차 주가는 무려 12%나 빠졌다. 기아차도 10%, 모비스도 11% 폭락했다. 뚜렷한 악재가 없는 상황에서 순전히 한전 부지 인수라는 이슈만으로 이 정도의 하락폭을 기록했다는 것은 시장의 시선이 얼마나 냉정한 지를 가늠케 한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10조5500억원을 연구개발비에 투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디젤을 비롯해 현대·기아차의 차세대 친환경차에 대한 기술력은 여전히 선두권 업체들에 비해 뒤쳐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지난해 연구개발비는 약 1조8500억원으로, 이번 입찰가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이상현 NH농협증권 연구원은 "현대차의 자금이 글로벌 부품사를 인수합병했거나 연구개발비에 투자하는 등 본연의 핵심 역량을 키우는 데 쓰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회비용 측면에서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현대차그룹은 이에 대해 통합사옥의 필요성과 향후 개발방향에 따라 성공적 투자로 이어질 수 있다며 백년대계를 내다본 결단이었다고 반론하고 있다. 시장 시선이 지극히 부정적으로 변하자 내심 당혹감도 커졌다. 그룹 내부에서는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진통을 겪었던 트라우마가 채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몽구 회장이 회장으로서의 통 큰 결단을 보인 만큼 문제 재론조차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다.
◇서울 영동대로 한국전력 부지 전경. ⓒNews1
◇ 토요타, 친환경차 연구개발에 향후 20조 투입..현대차 GBC건설 20조 투자와 대비
24일 글로벌 컨설팅업체 부즈앤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구개발비를 투자한 회사는 독일의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으로 나타났다. 폭스바겐은 2013년 한 해 동안 연구개발비로만 무려 114억달러를 집행했다.
폭스바겐이 쓴 연구개발비를 지난해 원달러 평균환율(1098원)로 환산하면 약 12조5200억원에 달한다. 현대차가 투입한 연구개발비의 약 6.7배 수준. 기아차가 지난해 투자한 약 1조240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합해도 폭스바겐의 25% 수준에 불과하다.
폭스바겐과 함께 연구개발비 지출 상위 15위 이내에 모두 5개의 완성차 회사가 이름을 올렸다. 6위를 차지한 토요타는 98억달러(10조7600억원), 11위 GM은 74억달러(8조1250억원), 13위 혼다는 68억달러(7조1940억원), 14위 다임러는 66억달러(7조원)를 지난해 연구개발비로 썼다. 이중 현대·기아차보다 글로벌 판매량이 높은 회사는 폭스바겐과 토요타, GM 뿐이다.
특히 친환경차 부문 선두주자인 토요타는 향후 하이브리드카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카 등 친환경차 개발을 위해 1조8000억엔(약 2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어 현대차의 이번 부지매입 결정과 더욱 대비되고 있다. 토요타의 높은 시장 지배력과 향후 먹거리에 대한 고민은 막대한 연구개발비로 귀결됐다.
현대차가 부지를 사들이는데 투자한 10조5500억원은 토요타의 1년치 연구개발비와 맞먹고, 토요타가 향후 친환경차 개발을 위해 투자할 약 20조원은 현대차가 구상하고 있는 GBC(Global Business Center) 건설의 총 투자 수준과 맞먹는 금액이다.
경제개혁연대는 "10조원이면 현대차의 6년치 연구개발비에 해당하는 금액"이라며 "상대적으로 현금 보유량이 적은 기아차가 한전 부지 매입에 상당액의 부담을 떠안을 경우 향후 거액의 자금이 소요되는 연구개발이나 설비투자에 소극적이거나 외부 차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최근 5년간 글로벌 기업들의 연구개발비 투자 순위.(자료=부즈앤컴퍼니)
◇"국내 웬만한 상장사 다 살 수 있는 엄청난 액수"..노사협상 테이블에도 불똥
시장에서는 이와 함께 현대차가 이번 투자금을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한 회사의 인수합병에 쓰지 못한 것을 또 하나의 아쉬움으로 보고 있다.
지난 15일 독일의 자동차 부품기업 ZF 프리드리히스하펜은 에어백과 부식방지 센서 등 전기 계통에 강점을 가진 미국의 자동차 부품회사 TRW오토모티브 홀딩스를 117억달러(12조1600억원)에 인수했다.
TRW는 글로벌 자동차 부품업계에서 지난해 매출액 기준 10위권의 대형 업체다. 10조5500억원에 약 5000억원 정도를 더하면 현재 전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대형 자동차 부품회사를 인수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금융권의 한 기업 인수합병 전문가는 "시장에 매물로 나온 상장기업을 인수하려면 지분의 약 30%를 매입하고 매각 프리미엄 20~30%를 얹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10조5500억원이면 국내 웬만한 상장사들을 대부분 살 수 있는 엄청난 액수"라고 평가했다.
실제 국내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서 대물로 평가받았던 SK하이닉스의 지난 2012년 당시 매각 대금은 3조8500억원, 2010년 대우인터내셔널의 매각대금은 3조4000억원에 불과했다.
현대차의 한전부지 인수로 인한 불똥은 현대차 노사의 임금협상 테이블에도 튀었다. 그간 실리주의 노선으로 평가받으며 사측과의 임금협상을 원만하게 이끌 것으로 기대됐던 이경훈 노조위원장도 사측의 이번 투자 액수에 단단히 뿔이 난 모양새다.
노조는 지난 23일 쟁대위 속보에서 "단체협상 내내 돈 없다고 목에 핏대 세워 통상임금 반대하더니 부동산 투기가 웬말이냐"며 "통상임금 확대비용 1조4000억원으로 회사가 경영난에 직면할 것처럼 말하더니 100년의 미래를 위해 10조원 투자한다는 것은 우습다"고 맹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