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여러번 되풀이함으로써 저절로 익고 굳어진 행동. '습관(習慣)'의 무서움이다. 그것이 나쁜 습관일 땐 더욱 그렇다.
재벌 총수들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탈세하고, 또 수천억원의 회삿돈을 횡령, 배임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가 풀려나는 모습 역시 대한민국이 가진 나쁜 습관 중 하나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은 공식이 됐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특별사면까지, 오래된 습관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이 습관에 대한 단절이 잠시나마 기대됐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거센 민심의 요구는 대선 당선과 동시에 대기업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중대범죄에 대해서는 사면을 제한하겠다는 천명으로 이어졌고, 지난 1월 집권 이후 첫 사면을 단행할 때에도 정·재계 비리 연루자들은 제외됐다. 재계와 공생해온 보수정권에 대한 우려는 기우로 끝나는 듯 보였다.
이를 지켜보는 재벌그룹들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징역 4년형을 받고 현재 최장기간(600일) 수감을 이어가고 있으며,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징역3년6월)도 차디찬 감방에 있다.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도 징역 4년의 실형을 확정받았다.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징역4년6월)과 이재현 CJ그룹 회장(징역3년)도 질병으로 보석과 구속집행정지처분을 받고는 있지만 실형 선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습관이 되살아나고 있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24일 언론 인터뷰에서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되는 사례라면 (사면이나 가석방을) 차단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잘못된 기업인도 여건과 여론이 조성되면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하자, 다음날에는 현 정부의 최고실세 중 한 명인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기업인이 구속 상태인 상황이면 투자에 지장이 있다"고 적극 화답하고 나섰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경제살리기. 경제가 어려우니 죄짓고 감옥에 있는 기업인들을 경영에 복귀시켜 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쁜 습관의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던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여건'과 '여론'을 운운하며 법이 내린 판단을 뒤집는 '기회'를 주자고 나섰고, 경제부총리는 '원칙에 어긋난 엄격한 법집행'이라는 앞뒤 맞지 않는 표현으로 경제살리기 명분만 내세우고 있다.
'엄격한 법집행'이 '원칙'인데, '원칙에 어긋난 엄격한 법집행'은 또 무엇인가.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는 법집행은 대충 해도 된다는 말인데, 이 무슨 궤변인가. 여건만 조성되면 법집행을 뒤집을 수 있다면 그 법집행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가.
법무부장관의 말처럼 기업인은 과연 역차별받고 있는 것일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태동한 배경이나 이해하고 하는 말일까.
일반인들이 수백, 혹은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탈세할 수는 없다.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재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거대한 범죄에 걸맞는 처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비리 재벌의 처벌이 무겁게 보이는 것은 그동안 걸맞는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습관화됐기 때문에 오는 착시일 뿐이다.
재벌 총수의 부재로 투자 결정이 늦어진다는 주장 역시 그 사실은 인정하되, 그것을 경제회복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아니 그야말로 억지다.
재벌 총수의 부재로 굵직한 투자결정을 하지 못하는 기업이 많다는 것은 한국 재벌기업의 의사결정 구조가 전근대적 수준임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일 뿐, 이것을 서민경제와 연결시킬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 어떤 규제개혁에도 굳게 닫혀있던 곳간이 총수 석방으로 풀릴 정도로 우리 기업문화가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이를 고쳐나가야 할 일이다.
그간 우리는 '경제살리기'라는 명분으로 많은 악습을 감내해 왔다. 노동력 착취는 현 세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만 있으면 공정한 경쟁과 균형발전은 무시당했고, 때로는 수십조원을 들여 국민의 재산인 아름다운 강과 산을 파헤치기도 했다.
경제회복은 경제정책과 체질개선을 통해 이뤄내야지, 법적 판단을 뒤집으면서까지 재벌 총수를 복귀시켜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총수 없이 투자가 안 된다면 총수 없이도 투자가 될수 있게 기업의 시스템을 바꾸면 된다.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을 운운하며 세월호 코스프레까지 동원하고, 재벌 봐주기를 위해 법의 존엄성조차 가볍게 무시하는 정치권이야말로 피폐해진 민생의 주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