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복서' 파퀴아오는 왜 농구 코트에 섰을까

입력 : 2014-10-22 오후 3:27:01
[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아시아의 자랑이다. 8체급을 오갔다. 1800cc 배기량의 자동차를 가지고 F1 대회와 월드랠리챔피언십까지 우승한 것과 같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을 했다.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필리핀의 범죄율이 급감한다."
 
김남훈 격투기 해설위원은 매니 파퀴아오(36·필리핀)를 놓고 이렇게 말했다. '프로 복서' 파퀴아오의 세계적 위상을 전달한 말이다.
 
◇매니 파퀴아오. (사진=파퀴아오 페이스북)
 
파퀴아오는 20kg의 체중을 불렸다 뺐다 하며 8체급을 석권한 복싱 스타다. 8체급 석권은 복싱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또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4체급 타이틀을 석권하기도 했다.
 
지난달 프로레슬링 전문 매체 '프로레슬링 뉴스레터'는 WWE, 복싱, UFC 선수들의 올해 구글 검색 순위를 공개했는데 파퀴아오는 3위를 차지했다.
 
◇대권 노리는 국민적 영웅
 
파퀴아오는 필리핀이 낳은 최고의 영웅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거리를 전전하고 담배를 팔며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복싱 선수가 됐다. 1995년 1월 12살의 나이로 링에 오른 파퀴아오는 1996년 1월까지 11연승을 거두며 주목받았다.
 
이어 1996년 5월부터 1997년 6월까지는 '8전 8KO 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한국의 복서 이성열과 이욱기도 파퀴아오의 연속 KO 행진에 당하며 한국 팬들에게도 파퀴아오의 이름이 각인됐다.
 
파퀴아오는 2001년 6월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세계 최고의 복싱 열기를 자랑하는 미국에서도 승수를 쌓아갔다. 미국은 그의 상품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파퀴아오는 2008년 12월에 미국의 오스카 델라 호야를 꺾었다. 호야는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미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복싱 금메달을 딴 선수였다. 하지만 '강심장'인 파퀴아오는 키 168cm의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11cm나 더 큰 호야에 8회 포기 선언을 받아내며 세계적인 복서로 올라섰다.
 
파퀴아오는 필리핀 현역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2009년 5월 선거에서 고향인 산토 토마스 사랑가니의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파퀴아오를 향한 필리핀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사진=로이터통신)
 
그는 '필리핀 영웅'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지난해 태풍 하이옌으로 필리핀이 고통받을 때 대전료 191억 원을 모두 기부했다. 이런 파퀴아오를 향해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실제 파퀴아오는 지난해 5월27일 프랑스 AFP통신과 인터뷰에서 '정계의 정상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 그는 "복싱을 시작했을 때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 목표를 향했다"면서 "정계에서도 복싱과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더 앞날의 일이다. 신의 의지를 따르겠다"고 덧붙였다.
 
이런 필리핀의 국민적 영웅 파퀴아오는 지난 19일(한국시간) 농구 선수로 변신했다. 필리핀 프로농구(PBA) 기아 소렌토 선수로 경기에 나선 그는 7분간 코트를 누볐으나 아쉽게 득점에는 실패했다.
 
이를 두고 AFP통신은 관중들이 "매니에게 패스해라"라고 소리쳤다며 파퀴아오를 향한 필리핀 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언급했다. 흥미로운 점은 파퀴아오가 지난 6월부터 이 구단의 감독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국민 영웅이 국회의원과 농구 감독을 거쳐 농구 선수까지 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간다.
 
◇파퀴아오, 왜 농구인가?
 
익히 알려졌듯이 필리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농구다. 필리핀의 농구 사랑은 미국 식민지 지배를 받은 역사와 함께한다. 필리핀은 1571년부터 1898년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1897년부터 1946년까지 48년간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400년에 이르는 식민지 역사를 경험했다.
 
지난해 필리핀 세부를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흙바닥에서 자유분방하게 공을 튀기며 농구에 열중하는 것을 봤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이 슬리퍼를 신고도 거침없이 뛰었다는 점이다.
 
현지 가이드는 "이들에게 농구화는 무척 귀한 품목이라 슬리퍼를 신고도 충분히 운동하는 데 지장 없다. 그래서 필리핀인들은 기본적으로 발바닥이 탄탄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가이드는 "미국이 처음 필리핀 국민들을 봤을 때 어떻게 하면 이들의 삶을 건강하게 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당시 필리핀인들의 평균 수명은 50살에 불과했다"며 "고민 끝에 미국은 자신들의 스포츠를 필리핀에 도입하기로 계획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식축구를 배급하려 했다. 그러나 장비와 넓은 경기장 등이 필요해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좁은 공간에서 장비 없이 할 수 있는 농구를 전파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필리핀은 아시아 최초로 1975년에 프로농구가 탄생했다. 실업 농구리그는 그보다 앞선 1938년부터 시작됐다. 지금도 필리핀인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은 쇼 프로와 농구 중계다. 필리핀은 농구전문채널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온종일 농구를 볼 수 있다. 농구 경기부터 미국프로농구(NBA) 명경기 등 다양한 형식의 프로그램이 계속 이어진다.
 
◇프로농구 코트에 선 '작은 거인' 파퀴아오. (사진=로이터통신)
 
다만 필리핀 프로농구의 시작에는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는 말이 있다.
 
필리핀의 10대 대통령이자 독재자로 알려진 페르디난도 마르코스가 두 번째 임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야욕'을 감추기 위해 이용했다는 것이다. 과거 개발도상국에서 정치와 스포츠가 얽힌 사례가 있는데 이와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파퀴아오의 이번 농구 선수 변신이 좀 더 필리핀 국민들에게 가깝게 다가서려는 의도라는 관측도 나온다. 물론 그에 앞서 그가 농구를 진정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감독을 넘어 선수 변신까지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필리핀과 한국 농구의 인연도 꽤 깊다. '원조 슛도사'로 불리는 전 농구 국가대표 신동파 씨는 선수 시절인 1969년 제5회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 필리핀과 결승에서 혼자 50점을 넣었다. 이때 큰 인상을 남겨 지금까지도 '한국 농구' 하면 신동파를 기억하는 필리핀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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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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