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그리스 연립정부가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당겨 치르기로 결정하자 금융권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재정 위기설까지 제기됐다.
집권 연정이 조기총선 후유증으로 붕괴되면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급진좌파가 권좌에 오르면서 재정 건전성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마라스, 조기 대선 승부수 띄워..성공 여부 불확실
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은 그리스 연립정부가 구제금융 조기 졸업이 무산되자 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기는 승부수를 던졌다고 보도했다.
당초 안토니스 사마라스 총리(
사진)가 이끄는 연정은 올해 안에 구제금융을 졸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제채권단의 반대로 연내 졸업이 무산되자 연정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기 대선이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사마라스 총리가 내세운 대통령 후보는 스타브로스 디마스 전 외무장관이다.
디마스 전 외무장관은 그리스 헌법에 따라 오는 17일에 열리는 1차 투표에서 의회 300석 중 200석을 확보해야 한다. 필요한 의석수를 얻지 못하면 오는 23일에 2차 투표가 이뤄지고, 여기서도 실패하면 3차 투표가 단행된다. 3차 투표에서는 기준이 180석으로 낮아진다.
문제는 당선을 위한 최소한의 의석수가 줄어든다 해도 여전히 필요한 의석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신민주당·사회당으로 구성된 집권 연정은 현재 155석을 차지하고 있다. 사마라스가 무소속 의원 24명을 어찌어찌 설득한다 해도 179석에 불과하다.
경제 전문 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비공식 조사를 인용해 정부가 최대 175표를 얻을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3차까지 대통령이 선출되지 않으면 그리스 연정은 해체되고 내년 2월1일에 총선이 열리게 된다.
◇제1야당 여론조사서 '우위'..시리자 29% VS 신민주당 24%
사마라스 총리가 승패가 불분명한 싸움에 배팅한 이유는 시간을 더 끌어봤자 좋아질게 없기 때문이다. 긴축에 반대하는 정책을 내세워 제1야당으로 급부상한 시리자를 조기에 견제하겠다는 심산이다.
사마라스는 자신이 미는 대통령 후보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는 것은 급진좌파 정당이 집권할 길을 열어주는 꼴밖에 안 된다는 논리로 무소속 의원들을 설득할 것으로 보인다.
집권 연정은 설령 대통령 선거가 실패로 돌아가 총선이 열린다 해도 거기서 다수석을 차지할 것이란 자신감도 내비치고 있다.
시어도어 코룸비스 아덴대학 교수는 "사마라스 정부가 총선에 앞서 선수를 쳤다"며 정부는 유권자들에게 현 정부를 택할 것인지 불안정한 길을 선택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리자가 현 연정을 물리치고 집권당이 될 것이란 견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플러스폴이 지난 5~6일 양일간 벌인 여론조사 결과, 시리자는 29%를 얻어 24%에 그친 신민주당을 5%포인트 차로 앞질렀다.
시리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진 이유는 현 정부가 단행한 긴축정책으로 실업률이 치솟은 데다 서민들의 생활고가 가중됐기 때문이다.
WSJ도 이런 이유로 시리자가 다른 정당과의 연정을 이뤄야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겠지만, 어찌 됐든 제1정당에 올라설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당수(사진)는 이날 당직자와 회의에서 "조기 대선 결정은 대중과 민주주의의 중대한 승리"라며 "결국 시리자가 중심이 된 정부가 출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금융권 '패닉'..유로존 재정위기 또 맞나
긴축에 반대하는 시리자가 총선에 승리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리스 금융권은 엄청난 패닉에 빠졌다.
그리스 ASE 지수는 정치권 불안에 전일 대비 13%나 하락해 지난 1987년 이후 최대 하락 폭을 기록했다.
◇최근 그리스 증시 추이 (자료=인베스팅닷컴)
3년물 국채 수익률은 하루 만에 무려 1.76%포인트 오른 8.23%에 도달했고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도 0.8% 포인트 가량 급등해 8.09%로 올라섰다.
시리자가 기존의 공약대로 긴축정책을 철회하면 그리스 경제를 나락으로 몰고 갔던 재정위기가 재발할 것이란 불안감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긴축에서 성장으로 방향 선회를 하면 씀씀이가 커지기 마련이다. 이는 곧 국가 부채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리스 재정위기가 그리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010년 유로존을 휩쓸었던 재정위기의 진원지가 바로 그리스다. 당시 그리스와 남유럽 국들은 산적한 부채 탓에 홍역을 치렀다.
최근에도 그리스발 재정위기의 전조가 눈에 띄어 이런 불안감은 가중됐다. 부진한 유로존 경제지표에 겁을 먹은 투자자들이 그리스를 시작으로 유로존 시장에서 발을 빼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0월16일 그리스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8.77%까지 솟구치며 지난해 10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날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재정위기에 직면했던 나라들의 국채도 일제히 상승했다.
그리스를 필두로 다른 유로존 국가에도 긴축반대를 공약으로 건 정당이 약진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재정위기를 부르는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분위기라면 내년 말에 열리는 스페인 총선에서 신진 좌파 정치조직인 포데모스가 정국을 주도할것 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 정당은 "우리는 할 수 있다"란 운동을 주도하며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게 연대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에서도 좌파 인사들이 들고일어나 긴축과 구조개혁에 반대하는 운동을 부활시킬 수 있다.
무즈타바 라흐만 유라시아그룹 애널리스트는 "그리스는 다른 남유럽 정치권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