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2일 오전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열린 2015년 시무식에 참석해 신년사를 하고 있다.ⓒNews1
[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이번에는 81조원이다. 땅값으로만 10조5500억원을 내질렀던 한국전력 부지 입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6일 또 하나의 '통 큰' 승부수를 던졌다.
설비투자와 시설투자 등에 49조1000억원, 연구개발(R&D)에 31조6000억원 등 모두 80조7000억원의 막대한 자금을 앞으로 4년 내에 쏟아붓겠다는 계획이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2018년까지 매년 20조원이 넘는 금액을 투입하는 것으로, 현대차의 역대 최대 투자액인 지난해 14조9000억원보다 35%나 많은 금액을 설정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약속이다.
현대차는 왜 새해 벽두부터 사상 최대 금액을 쏟아붓는 중장기적 투자 계획을 내놨을까. 현대차의 이번 투자계획 발표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명예회복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9월 한전부지 입찰에 10조5500억원을 베팅하면서 안팎으로 신인도를 크게 상실했다. 경쟁자인 삼성전자를 따돌리고 서울 강남의 마지막 노른자위 땅을 따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출혈이 과도하게 컸다.
감정가액의 세 배가 넘는 입찰가는 오너 경영의 폐해로까지 지적됐고, 외국인 투자자 이탈과 주가 폭락 등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하반기 실적 부진까지 겹치면서 현대차의 시가총액은 급전직하, 급기야 시총 2위의 자리를 SK하이닉스에게 내주는 굴욕까지 맛봤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의 외면은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현대차에 대한 외국인 순매도는 지난달에만 15거래일 연속 이어졌다. 이달 들어서도 6일째 순매도다. 배당 확대 등의 주주가치 제고 정책도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지난 한 달간 외국인 순매도액은 3000억원이 넘는다.
때문에 현대차가 이번 투자계획에서 R&D 비중을 크게 늘린 것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맞춤형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땅 매입 외에 기술개발 등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자동차 업계에서 글로벌 리더로의 도약이다. 현대차는 이날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를 통해 친환경자동차와 스마트자동차 등 미래차 관련 핵심기술을 집중 확보함으로써 해당 분야 업계 리더로 도약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대차는 국내에서는 삼성에 이어 재계 2위 그룹이지만 해외로 나가면 여전히 도전자의 위치에 있다. 2014년 글로벌 완성차 매출액 순위에서는 폭스바겐, 토요타, 다임러, GM, 포드에 이어 6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영업이익에서는 토요타, 폭스바겐, 다임러, BMW에 이어 5번째다. 삼성전자가 경쟁자들의 추격을 걱정하면서도 글로벌 1등 기업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정몽구 회장 역시 1등을 누구보다 갈망하고 있다. 2000년 현대그룹에서 분가해 10년 만에 100년 역사의 글로벌 명차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올려놓았지만, 이제는 세계 명차를 뛰어 넘어 업계 선도기업으로의 지위가 목표다. 특히 과거 굳건했던 재계 1위 현대가 장자로서의 자존감은 상당하다.
정 회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세계 시장의 명실상부한 선도업체로 입지를 굳건히 하고,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 제품 경쟁력과 고객만족도 향상을 위한 집중적인 노력이 더욱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강조한 점은 이번 투자계획의 목표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전체 투자계획의 85% 이상인 68조9000억원을 자동차부문에 투입하고, R&D 투자를 성장시장 대응을 위한 현지 전용차, 친환경차 등 미래차, 고급차관련 기술 및 제품개발에 초점을 맞춘 것 역시 글로벌 자동차 선도기업을 지향한다.
내수 회복에 대한 현대차의 역할도 이번 투자계획의 중요한 비전 중 하나다. 현대차는 80조7000억원의 총 투자액 중 4분의 3에 해당하는 61조2000억원을 국내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생산·판매체제 강화를 위한 핵심 부품공장 신설 및 증설, IT강화 등 기반 시설투자와 한전부지 위에 건설할 계획인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 등 시설투자에만 34조4000억원, 제품 기술개발 등 R&D에 26조8000억원이 각각 투입된다.
이는 곧 정부에 대한 적극적 구애로도 읽힌다. 내수 활성화가 국정 최대 과제인 박근혜 정부와 보조를 맞춤과 동시에 사내 유보금에 대한 과세 등 각종 유인책을 제시한 최경환 경제팀에 대한 철저한 화답의 성격도 짙다는 게 재계 안팎의 평가다.
현대차는 국민차라고 할 만큼 내수 의존도가 크지만 최근에는 그 위상이 극도로 약화됐다. 독일차를 중심으로 한 수입차의 거침없는 공세 속에 야심작이었던 신형(LF) 쏘나타가 부진하면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여기에다 연비논란까지 겹치면서 신뢰를 크게 상실했다. 현대차의 승용 내수 점유율은 지난해 11월 기준 36.3%에 그쳤다.
현대차 관계자는 "전체 투자액의 76%를 국내에 집중하게 되면서 현대차가 국가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