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애신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한 차례 불발에도 재도전하는 강수 끝에 현대글로비스 지분 블록딜(시간외 대량매매)을 성공리에 마쳤다. 재계에서는 1조원이 넘는 지분 매각 금액을 향후 지주사에 위치할 현대모비스 지분 매입에 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은 일감 몰아주기를 제한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에 대응하기 위함일 뿐, 지배구조 개편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내부적으로는 현대글로비스의 주가 안정화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대주주 지분에 묶여 있는 보호예수기간 내에 주가가 폭락할 경우 향후 자금 마련이 순탄치 않음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기아자동차 사옥(사진=현대차그룹)
6일 IB업계와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전날 장 마감 이후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13.39%(502만21270주)를 블록딜 방식으로 매각 완료했다. 최종 매각가격은 이날 종가보다 2.7% 할인된 23만500원으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총 매각 금액은 1조1576억원이다.
앞서 한 차례 실패를 감안해 블록딜 대상 물량이 전량 소진되지 않을 경우 매각 주관사인 시티글로벌마켓에서 잔여 물량을 인수하기로 해, 사실상 성사는 예정됐었다.
이로 인해 정 회장 부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율은 기존 43.39%에서 29.99%로 대폭 낮아졌다. 공정거래법상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지 않는 '보유지분 30% 이하' 기준을 0.01% 차로 충족하게 됐다. 지분율은 낮아졌지만 현대글로비스에 대한 최대주주 지위는 그대로 유지된다.
현대차그룹은 블록딜 매각에 대해 "공정거래법 개정 취지에 부응하고, 블록딜 재추진 여부를 둘러싼 시장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이라면서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했다.
남은 지분은 향후 2년 동안 보호예수로 묶여 있어 매각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시장의 불안감을 덜어 급격한 주가 변동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동시에 지배구조 개편 등 경영권 승계와도 선을 그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이 같은 현대차그룹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재계에서는 이번 매각이 경영권 승계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로 이뤄져 있다. 현대모비스가 사실상의 지주사 위치에 올라있다. 지배구조와는 달리 지분 관계는 불안정하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모비스(012330) 지분 6.96%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정의선 부회장은 지분이 없다.
정 부회장이 현대차그룹에 대한 경영권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대모비스 지분 확대가 필수다. 이번 블록딜로 마련한 자금으로 그룹의 실질적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 모비스 지분을 확보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주된 이유다.
앞서 시장에서는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경영권 승계작업을 근거로 현대차그룹이 비슷한 시기에 경영권 승계에 착수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비등했다. 재계 1위 삼성에 쏠리는 여론의 시선을 틈타 분산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곧 삼성SDS를 현대글로비스와, 제일모직을 현대모비스와 같은 위치에 놓는 해석으로까지 이어졌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실탄 마련의 창구로 삼성SDS와 현대글로비스를 지목한 것. 제일모직과 현대모비스는 지주사의 위치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가 당장 이뤄지기에는 아직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많아 당장의 급박한 변화는 없을 것이란 게 시장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다. 이번 블록딜은 포석일 뿐, 남은 과제가 많아 좀 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다.
엄경아 신영증권 연구원은 "매각차익금 활용에 대한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현대모비스 지분 매입이지만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지분율이 4%도 되지 않는다"며 "현대글로비스의 기업가치가 추가적으로 높아져야만 합병이나 지분 맞교환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남은 지분이 30% 가까이 있는 만큼 당장은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주력할 것이란 설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당장 수년 내에 경영권 승계를 완료하지 않더라도 정의선 부회장 체제로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결국은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방향으로 장기적인 시나리오를 짰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주사 체제 전환이 어려운 과제지만 이를 통해 경영권을 크게 강화할 수 있기에 재계는 여전히 이를 선호하고 있다. 또 지주사 체제 전환에 대한 정부의 각종 혜택도 이를 유인하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