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맛지도 (대학생의 마음을 동하게 한 맛집 지도)
꼭 그런 날이 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거나, 친구가 예상 못한 상황 때문에 약속에 늦는 그런 날 말이다. 그럴 때면 친구를 기다리며 어디 돌아다니기도 시간이 애매하고, 특히나 덥고 추운 여름과 겨울에는 그러고 싶은 마음도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로 약속 장소 주변 카페에 가서 부담되지 않는 가격의 음료를 하나 시키고 그 시간을 채운다.
평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독서도 해보고, SNS 타임라인을 끊임없이 새로 고치며 지인들의 근황에 ‘좋아요’를 눌러준다. 카페 안에 흐르는 잔잔하고 달달한 음악은 가볍고 짧은 자유 시간에 색을 입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부드러운 통기타 소리와 달콤 쌉싸름한 커피의 향기가 어우러진 카페에서 사람들은 감성에 젖고, 빠르게 흘러가던 일상 속에서 자신을 ‘일단 멈춤’ 한다. 우연이 만들어준 이 작은 기쁨은 꽤 사람들을 만족시킨다.
나는 주로 이 기쁨을 스스로 만드는 편이다. 약속 시간 한두 시간 정도 전에 미리 약속 장소에 가 있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그 시간에만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나는 좋다. 딱히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카페도 대로에 떡하니 나와 있는 큰 체인 카페는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이럴 땐 역시 골목길 안 작고 오래된 카페, 아니 다방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곳이 제격이다. ‘아는 사람만 알고, 오는 사람만 온다.’ 는 그런 카페에서 원두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앉아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커피의 카페인 성분이 피로회복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 영 기분 탓만은 아니리라.
나의 주요 활동범위인 신촌에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카페는 단연 ‘미네르바’이다. 미네르바는 1975년 신촌에서 처음 생긴 원두커피 전문점으로, 신촌 일대 카페들의 수장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있는 카페이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날도 나는 역시 약속 한 시간 전에 신촌에 미리 도착해있었다. 아직 신촌 대학로 지리에 익숙지 않던 새내기 시절이라 약속 시간 전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작고 조용한 공간을 찾고 있던 나는 명물거리 골목에서 한글로 ‘미네르바’ 라고 적힌 카페를 발견했다.
그 이름 외에 다른 설명이나 장식이 돼있지 않은 것도 신기했고, 거기다 조용한 골목 구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고민 없이 나는 내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더 작았지만, 오래된 가구들과 책들로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알맞게 꾸며져 있었다.
또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 신촌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저 생각 없이 걸었을 땐 복잡하기만 했던 신촌 지리가 2층에 앉아 내려다보니 그 구조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그것을 마시면서 나는 앞으로 이곳을 나의 단골 카페로 정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후로는 신촌에서 약속을 잡을 때마다 미네르바에서 한두 시간 머무르며 일상에 잠깐 쉼표를 찍었다.
◇사진=바람아시아
미네르바에서의 시간은 내가 그곳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품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미네르바가 처음 신촌에 문을 연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신촌은 빠르게 변화해왔다. 대학로에서 학생들에게 술과 안주, 싼 커피를 팔며 생계를 이어가던 개인 점주들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대기업의 체인 점포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갔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미네르바는 그만의 전통과 방식을 유지하며 신촌 한 구석을 꿋꿋이 지켰다. 나는 미네르바의 어떤 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인터뷰어로서 찾아간 미네르바는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향기로운 원두 냄새로 가득했다.
“신촌 미네르바는 누구나, 언제든지 편하게 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갈 수 있는, 바쁘고 지친 사회인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 분위기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지 않나요? (웃음)
미네르바는 여럿이서 와도 좋고 혼자서 와도 좋습니다. 요즘엔 특히 혼자 오시는 분들이 눈에 띄는데, 그분들에게 이곳은 독서할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하고 작업 공간으로도 활용되기도 합니다.”
사장님께서 말씀해주신 ‘미네르바’는 한마디로 편안한 공간이었다. 내부 또한 아늑한 분위기를 내는 짙은 밤색 벽과 오래된 탁자와 소파들로 채워져 있었다. 딱딱한 의자와 화려한 조명으로 꾸며진 대형 커피숍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테이블과 가까이 위치한 카운터에서는 원두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드르륵, 드르륵 하고 울렸다. 그 소리는 연필을 주로 쓰던 그 시절 교실 뒤에 선생님이 놓아두셨던 철제 연필깎이 돌리는 소리를 떠오르게 했다. 어린 시절 추억도 회상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도 마시면서 푹신한 소파에 파묻힐 수 있는 미네르바는 아늑함 그 자체인 공간이었다.
◇사진=바람아시아
커피를 내리는 카운터 뒤편에는 여러 가지 원두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커피 마시는 것은 좋아하지만 원두나 커피 제조법에 대해선 문외한인지라 미네르바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커피에 대해 물었다.
“제가 이 카페를 인수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커피 맛이었어요.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커피 맛도 있겠다, 다른 카페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은 느낌이 있어 이곳을 선택했죠. 이름도 그 당시 다른 향토적인 카페와는 달리 미네르바,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았어요.
카페 인수 후에는 커피에 대해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유명한 커피숍에 찾아가 보기도 하고, 우연히 지나치게 된 동네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보기도 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홍대에 있는 어떤 카페였는데, 커피도 참 맛있었고 추출법이 굉장히 특이했어요.
물론 커피 맛은 미네르바도 지지 않죠. 우리 카페는 신촌에서 최초로 사이펀(기압과 온도에 따른 기압차를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는 기구)을 이용해서 원두를 내렸어요. 그건 미네르바만의 자부심이죠.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고요.”
“미네르바가 신촌에서 처음으로 원두커피를 내린 곳이기 때문에 원두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요. 브라질, 케냐, 에티오피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원두를 공수해옵니다. 지역마다 원두 향이나 커피 맛도 미묘하게 달라요.
예를 들면 에티오피아 원두 같은 경우는 꽃향기가 나고, 군고구마같이 고소하고 단 맛도 납니다. 또 가끔 초코향도 나고요. 과테말라 원두는 화산지역의 연기 같은 향이 나요. 타는 냄새라고 하면 될까요? 또 인도네시아 원두는 중후하고 무게 있는 향이 납니다. 커피는 쓴맛도 나도 단맛도 나고요.”
◇사진=바람아시아
커피에 대해 물어본 나의 질문은 짧았지만, 사장님의 대답은 그의 커피에 대한 열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길었다. 다양한 산지의 커피 맛을 구분할 수 있게 될 정도로 커피를 연구하고 공부했을 사장님이 새삼 대단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자신의 미각과 후각을 단련해서 커피를 구분하고 각각의 특징을 잡아낸다는 것은 정말 그것에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할 터였다. 어쩌면 미네르바가 매일 빠르게 변화하는 신촌에서 이때까지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인 ‘커피’에 집중한 사장님들의 고집 덕분이 아니었을까.
나를 위해 사장님께서 준비해주신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인터뷰에 잠깐 숨을 돌렸다. 이번에는 평소와 다르게 커피 향부터 맡으며 천천히 음미해보았다. 보통 나는 커피를 마실 때 맛과 향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느낀다기보다는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음료로서 커피를 선택하는 편이다.
나에게 커피는 누군가와 편안하게 대화를 할 때 분위기를 풀어주는 도구 정도의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각각 커피들만의 향 차이, 맛 차이를 느껴보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무슨 차이가 있고, 어떤 향이 나는지 잘 모르지만, 목 넘김이 조금 특별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커피를 음미하면서 새삼스레 천천히 미네르바 안을 둘러본 나는 창문에 눈길이 갔다. 2층에 위치한 미네르바에서 내려다 본 신촌은 매우 바쁘고 분주했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점포도 보였고, 춤을 추는 한 무리의 댄스 크루도 보였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대형 체인 커피숍들이었다. 화려한 외관을 하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건물 1층에 위치한 카페들은 대형 자본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심지어 한 카페는 건물의 1층부터 3층까지 통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이 크고 화려한 카페들 사이에서 미네르바가 살아남은 것은 어떻게 보면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촌의 모습을 10년 넘게 지켜봐 온 사장님에게 이곳에 일어나는 ‘변화’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는 지 물었다.
“글쎄요. 자연스러운 흐름 아닐까요. 변화는 어디에도 있어요. 이곳 신촌에도 있고 미네르바 자체에도 있죠. 먼저 신촌에 일어난 변화들을 생각해보면, 카페 주인인 저로서 늘어난 커피숍 수에 당연히 눈길이 가죠. 제가 보기엔 유행 같아요.
이렇게 커피숍들이 늘어나는 것도. 커피 관련 업종이 유망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대기업에서도 투자하고, 너나나나 뛰어들기 시작했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하나가 성공하면 그걸 쉽게 따라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분들은 분명 있어요. 미네르바를 예로 들면 우리만의 장점을 잘 알고 잘 살렸기 때문에 이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전에 비해 큰 기업들과 경쟁을 하다 보니 힘들어진 것이 없지 않아 있지만, 좋은 원두와 미네르바만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를 이어나가면서 가게를 운영해나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변화에 대응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네르바 자체에도 물론 변화가 있었습니다. 10년 전쯤에 인테리어도 큰 틀을 바꾸지 않는 방향으로 몇 군데 수정했고요. 가장 큰 변화는 오시는 손님들이 변한 것이에요. 예전에는 혼자 오시는 분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는데, 요즘엔 혼자 오셔서 책도 보시고,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가시는 분들이 많아요.
남자 두 분이 오셔서 수다를 떨고 가시는 것도 예전엔 상상도 못했죠.(웃음) 혼자 오시는 분들이 많아진 건 사회 전반적인 변화와도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회가 굉장히 개인주의적으로 변했죠. 그 단적인 예를 저는 공중전화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다 개인 휴대전화 사용하잖아요. 근데 꼭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퍽 괜찮아요. 너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죠. 혼자 오시는 것도 그럴 수 있고, 그 나름의 사정과 생각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모습들이 자유로워 보여서 좋을 때도 있어요.”
미네르바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역시 커피맛과 편안한 분위기이겠지만, 그것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는 단골손님들도 있다. 40년의 역사를 지닌 곳인 만큼 꽤 많은 단골들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단골이요? 단골도 물론 있죠. 손님들 유형은 변했지만 꾸준히 오시는 분들이 분명 있어요.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 많이 줄었죠. 외국에 나가 사시다가 10년, 20년 만에 다시 찾아오셔서 젊었을 적 향수를 추억하고 가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분들 보면 제가 다 감사하고 고맙죠. 제일 기억에 남는 분은 여기서 프러포즈를 하신 손님이에요. 카페에서 프러포즈를 할 수도 있지만, 그걸 계기로 결혼에 성공하셔서 자식과 함께 다시 이곳을 방문해주셨거든요 그분이. 대를 이어서 오시는 거죠. 그런 분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오래된 곳들이 계속 지속되고, 남아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이곳이 그분들에겐 소중한 추억과 향수를 간직한 고향 같은 곳이니까요.”
변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변화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보통 변화에 대해 이분법적인 답을 내놓는다. 변화를 안타까워하고 옛것을 지켜야한다고 보는 사람들과, 빠르게 바뀌는 사회에 맞춰 우리도 빠르게 가야한다는 사람들은 쉽게 접점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네르바 사장님은 변화에 어떤 개인적 잣대를 두고 평가하지 않았다. 그저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바뀌지 말아야 할 미네르바만의 특징을, 자긍심을 묵묵히 지켜온 듯 했다. 나는 그의 이런 담담함과 꾸준함이 지금까지의 미네르바와 앞으로의 미네르바를 연결해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의 미네르바를 생각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에요. 미네르바만의 오래됨과 아늑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게 여간 힘들지 않죠. 일단은 손님이 편안하고 좋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커피도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연구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미네르바를 아껴야겠죠.
새로운 경험도 해보고, 또 색다른 메뉴나 분위기도 접목시켜 보고요. 물론 기존 미네르바의 색을 흩트리지 않는 선에서요. 미네르바가 앞으로도 지속되고 유지될 수 있으려면 그만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네르바는 앞으로도 신촌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편안함과 만족을 줄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손님들을 위해 항상 제일 맛있고 신선한 상태의 원두를 준비하고, 분위기를 내는 것은 저의 몫이겠지요. 신촌에서 ‘커피’하면 미네르바가 떠오를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또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미네르바를 이어온 분들의 가치가 이어져서 후대에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그 연결고리 역할도 최선을 다해 완수할 생각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피곤하고 지친 현대인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장소가 이 미네르바가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는 신촌 주민이지만 언젠가 나도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도 결국 신촌은 추억의 장소, 그때 그 장소쯤으로 기억될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나에게 작은 욕심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이 추억의 장소에 언제까지나 미네르바가 남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끔 현재의 삶에 이리저리 치여 과거가 슬프도록 그리울 때, 혹은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 그때 그 커피의 맛이, 그곳에서 읽었던 얇은 시집의 한 구절이 생각날 때 미네르바에 다시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곳의 커피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