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 국방장관의 방한 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의 한반도 배치 논란이 지난 18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케리를 필두로 한 미국의 고위 당국자들은 한국의 사드 수용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미 당국자들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발언 포인트’를 공유한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입장이 어느 정도 정해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달 말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한·미 국방장관회담과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한국 내에서 사드 문제를 공론화하고 수용하라는 주문을 할 수도 있어 보인다.
미 국무부의 프랭크 로즈 군축·검증·이행 담당 차관보는 지난 19일 한미연구소(ICAS)의 주최로 워싱턴DC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우리는 한반도에 사드 포대의 영구 주둔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당국자가 공개적으로 ‘한반도 영구 주둔’을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우리는 최종 결정을 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와 공식 협의를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미국 정부의 뜻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제임스 윈펠드 미 합참차장도 같은 날 다른 자리에서 “여건이 성숙되면 한국 정부와 (사드 문제를) 대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이 지난달 10일 한·미 국방장관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세계 누구와도 사드 배치를 논의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선을 그은 것과 확연이 다른 태도다.
터닝포인트는 카터의 발언으로부터 40여일 후 나온 케리의 말이었다. 그 사이 북한의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사출시험과 KN-01 함대함 미사일 발사 등이 있었다. 케리 장관은 지난 18일 용산 주한미군기지에서 “우리는 (북한의 위협으로 인한) 모든 결과에 대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드와 다른 것들에 관해 말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자 외교부와 주한 미국대사관이 ‘사드 논의는 전혀 없었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바로 다음날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은 다시 불을 지폈다. 그는 “어떤 시점이 (사드) 배치에 적절한지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혀 미국이 사드 배치 검토에서 나아가 한반도 배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정부는 미국의 요청·협의·결정이 없었다는 이른바 ‘3 NO’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20일 “미국이 우리 측에 공식 입장을 통보해온 바 없다”며 “요청이 오면 군사적 효용성과 국가 안보상 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도 21일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에 사드를 배치하는 문제에 대해 검토 중인 것으로 안다”며 “검토가 끝나 한국 정부에 협의를 요청하면 정부는 당연히 협의한다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 고위 당국자들이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는 한편 유승민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일각에서도 사드 찬성론이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가 이처럼 소극적인 태도만을 보인다면 결국 미국의 뜻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한민구 국방장관이 지난해 사드 배치를 긍정 평가했다는 사실로 미뤄, 정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미국의 요구를 받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김민석 대변인의 말로 볼 때, 미국은 한국의 사드 직접 구매를 요구하기보다 일단 주한미군 배치를 검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즈 차관보와 윈펠드 합참차장이 공히 사드 배치 해당국의 ‘기여’란 용어를 쓴 것으로 볼 때, 주한미군 배치가 결정되더라도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형식으로 비용 부담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