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시대를 예고라도 하듯 AI를 주제로 한 영화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AI는 외로운 솔로남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는 카운슬러로 그려지는가 하면 인류를 종말로 몰아가는 파괴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AI에 대한 영화 속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듯 현실에서도 두 가지 시각이 공존하고 있어 우리에게 기대감과 두려움을 심어준다. AI를친구로 보는 쪽은 생산성 혁명이 일어나 인간의 삶의 질이 엄청나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AI를 적으로 여기는 측은 기계가 인류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며 두려움에 떤다. 양측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근 15년 뒤쯤 지금 있는 직업 절반이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란 보고서가 나온이후 양측의 공방전이 다소 주춤해졌다. 대신 AI가 고용 생태계에게 미칠 파장에 대비하는 것이 먼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옥스퍼드 대학의 조사에 따르면 오는 2033년까지 미국 내 주요 직업 702개 중 47%는 로봇에 의해 대체돼 없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사라질 직업 군으로는 위기평가원, 이벤트 보조, 자동차 세일즈맨, 서적 편집인, 일반 행정직, 콜 센터 직원, 벌목공, 슈퍼마켓 캐시어 등이 꼽혔다.

 

기자도 없어질 직업군에 올랐다. AI기자는 벌써 세계 언론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LA타임즈는 이미 퀘이크봇이란 AI 기자가 지진이나 해일 등 자연재해 기사를 직접 작성하는 구조를 만들어놨다. 뉴욕타임즈(NYT)도 온라인에 노출되는 기사의 60%를 AI가 올리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영국 가디언은 편집장 없이 AI를 이용해 종이신문을 발간할 계획이다.

 

 

요리사들도 안심할 때가 아니다. 최근 메릴랜드주 대학 연구진은 샐러드를 만드는 로봇 '줄리아'를 개발했다. 샐러드 같은 단순한 음심을 만든 것이 뭐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줄리아는 샐러드 조리법을 유튜브 영상을 직접 보고 배웠다. 사람처럼 말이다. 아직 개발 초기 단계로 복잡한 음식은 만들 수 없지만, 조리법이 단순한 것들은 유튜브 동영상만 있으면 얼마든지 선보일 수 있다.

 

심지어 화이트칼라 전문직인 인적자원관리 전문가와 금융거래중개인도 리스트에 들어갔다. AI의 지적 능력이 석•박사급 인력을 대신할 정도로 향상된 것이다. 사무실 잡무나 전화 여론조사 업무를 하는 데 그쳤던 AI가 이제 수천억원 단위의 금융거래를 중재할 주체로 거듭났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19~ 20세기 동안 더럽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했던 기계가 이제 인간이 독점하던 지적 결정권까지 빼앗아 올 정도로 진보했다고 평가했다. AI의 지적 진보는 ‘튜링 테스트’를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지난해 6월 러시아 연구진은 AI가 인간과 얼마나 인간과 비슷하게 대화하는지 확인해보는 튜링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대화를 나눴던 심사위원 30명 중 10명은 상대가 AI인지 인간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AI의 지적 능력은 최근 몇 년간 급속도로 향상됐는데, 이는 글로벌 기업들의 막대한 물량공세와 연구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 바이두 등 세계적인 기업들은 AI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실험실을 만들고 관련 스타트업을 매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실제로 구글은 지난해 1월 AI 기술개발 업체인 딥마인드를 4억달러를 주고 인수했다.

 

인재 영입전도 치열하다. 페이스북은 얀 리쿤 뉴욕대 교수를 필두로 연구진을 편성했고 바이두는 스탠퍼드대 컴퓨터공학과 교수인 앤드루 응을 영입해 추격전에 나섰다. 앤드루 응은 AI 구루로 통하는 인물로 구글에서 일하다 작년에 바이두로 자리를 옮겼다.

  

이와 같은 기업들의 노력으로 AI의 지적 능력이 인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자 창의성 같은 인간 고유의 특성을 살려야 고용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 급부상했다. 마침 옥스퍼드 대학이 비교적 나중에 대체될 직업군으로 연기자, 화가, 무용가 등 예술인 직군이 대거 꼽혀 이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창의력을 가미한 마케팅 기획자,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광고 매니저, 창조적인 토목기사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면 기계에 자리를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창의력이란 것이 항상 발휘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창의력을 발휘할 만한 직종에 종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국에서 창의력을 요구하는 직군은 21%에 불과하다. 대량 실업사태에 대한 해법으로 창의력만 강조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인간과 기계가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강구하고 있다. 하나의 일자리를 두고 인간과 기계가 대립하는 ‘제로섬게임’이 아니라 서로의 단점을 보충해주고 각자의 장점은 극대화하는 ‘윈윈게임’으로 사고의 틀을 바꾸려 하고 있다. 메릴랜드주 대학 AI 연구 관계자는 “인간과 기계가 서로 다른 부문에서 조화롭게 일하는 것을 목표로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찍부터 이런 식으로 일을 분담하고 있는 기업도 있다. 기업경영전략을 제시하고 평가하는 곤고스(gongos)는 빅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을 AI가 담당하고 고객을 상대로 한 정보 제공 업무는 직원이 전담하고 있다. 자료처리 능력은 기계가 더 낫지만, 그것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내는 일은 사람이 기계보다 월등하다는 판단에서다. 의약계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프레이밍햄에 위치한 스타트업 베르크는 분자패턴을 찾는 작업을 AI에게 맡겼고 그 결과물을 토대로 생화학자는 어떤 조합이 더 훌륭한지를 검토하는 일을 했다.

 

윤석진 기자 ddagu@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