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을 말했지만 1년 반이 지나도록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평화·통일과 역사 문제에 평생을 바친 원로들은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과정”이라며 점진적인 교류 확대 노력을 주문했다.
‘한반도평화포럼’은 5월 26일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대강당에서 단행본 <통일은 과정이다> 출판기념회를 겸한 ‘광복 70주년, 6·15 공동선언 15주년’ 특별좌담회를 열었다. 포럼 공동대표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사회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패널로 나섰다.
패널들은 이명박 정부 5년과 박근혜 정부 2년 반 동안 남북관계가 긴장과 대립국면으로 퇴행한 상태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그 원인과 해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역사학자인 강만길 교수는 “현 정부는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해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 우선 화해와 협력을 통해 민족통일을 하고, 경제·문화 교류를 늘려 국토통일을 하고 이후 국가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동원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7년은 그 이전 20년간 해오던 한반도 평화와 남북화해·협력 노력을 부정하는 ‘안티테제’의 시대”라면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공동선언, 2007년 10·4 정상선언을 사실상 전면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좋은 정책이지만 북한이 신뢰를 보여야 우리도 신뢰를 줄 수 있다는 접근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임기도 2년 반 남았지만 6·15 선언 15주년과 광복 70년을 잘 활용하지 않으면 정권 말기까지 남북관계 개선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교수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통일정책은 완전한 실패와 퇴행으로, 통일에 대한 철학이나 비전이 없다”면서 “(지지기반인) 보수층의 요구에 따르다 보니 그 안에 갇혀버렸는데, 그 보수층 안에는 분단을 통해 이익을 얻는 계층이 많다”고 주장했다.
백낙청 교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어떻게 할지 몰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안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면서 “다른 일에서 잇속을 챙기는 것 보면 굉장히 유능한 사람들 아니냐”고 반문했다.
백 교수는 “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보수라고 흔히 말하지만 노태우·김영삼 정부는 6월 항쟁이란 전환의 물결을 타고 집권한 합리적인 보수로 통일문제에서도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면서 “반면 이명박 정권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위기감을 느낀 수구기득권 세력이 결집해 반격에 나선 결과로, 엄밀히 말해 보수보다는 반동·퇴행”이라고 규정했다.
백 교수는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국내 개혁과 남북관계 개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진전시키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기득권 세력의 막강한 힘을 이겨낼 만한 전략이 없었는데, 지금의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에 사회자인 이종석 전 장관은 “종북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는 종북 프레임에 야당이 굴복하면서 싸우지도 못할 정도가 된 것 아닌가 싶다”고 부연했다.
이러한 퇴행적 상황에 놓인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선 결국 소통과 교류가 필요하다고 원로들은 입을 모았다.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내며 햇볕정책을 진두지휘했고, 최근에도 회고록 <피스메이커> 개정증보판을 내놓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임동원 전 장관은 특히 양안관계(중국-대만 관계)를 예로 들며 상이한 체제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했다.
임 전 장관은 “양안관계는 차이점은 제쳐두고 공동 이익을 추구한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 정신에 기초한 경제 우선 실용주의로 최근 5~6년 사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면서 “2008년 주당 30편으로 시작한 중국~대만 간 정기 항공노선이 지금은 800여 편 운항되고 있다. 8만 여개의 대만 기업이 중국에 진출했고 중국 상주 대만인도 200만 명이 넘는다”고 소개했다.
그는 “정경 분리 원칙으로 경제공동체를 형성해 경제사회적으로 통일된 것과 비슷하다면 ‘사실상의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며 “경제학자 20명이 쓴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책을 보면, 우리 국내총생산(GDP)의 약 1%(100억 달러)만 북한 사회기반시설(SOC)에 투자하면 우리 경제에도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의 의식 변화를 이끌고 민심도 얻을 수 있다”면서 “통일이 되면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북한 노동자 임금이 남한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현 상황에서 한다면 통일비용도 크게 절약할 수 있다”며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이만열 교수도 “공업단지를 휴전선에 10개 정도 만들면 남북이 서로 침략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고, 100개 정도 만들면 실질적 통일이 되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이성휘 기자 noirciel@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