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잔치’를 끝낸 박근혜 정부가 다시 냉엄한 외교적 현실 앞에 섰다. 양국 정상이 서울·도쿄 기념식에 교차 참석하자 잘하면 올해 안에 첫 정상회담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두 나라가 갈등하는 이슈의 성격이나 동북아의 정세로 볼 때, 아직은 성급한 전망이다.
정부의 첫 번째 고민은, 한·일 간 핵심 쟁점은 그 자체로 매우 어려운 과제라는 사실이다. 우선 위안부 문제를 어정쩡하게 봉합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 분쟁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도록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반면 일본은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법적 책임은 종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을 전제로 한 위안부 문제 해법에 한국이 동의하는 것은 헌재의 결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한·일 관계를 좌우할 두 번째 쟁점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8월 발표하는 ‘전후 70년 담화’의 내용이다. ‘식민지배’ ‘침략’ ‘반성’ ‘사죄’라는 4대 필수 요소가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최근 일본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아베 담화에는 온갖 꼼수가 동원될 것으로 보인다. ▲‘4대 요소’는 다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불충분한 담화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정부의 공식 견해를 뜻하는 ‘각의 결정’이 아닌 총리 개인의 담화로 발표할 것이며 ▲발표 날짜도 8월 초로 앞당기려 한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이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내지 않는 것이 어떠냐’고 충고할 정도의 담화를 듣고도 정부가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면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국내정치적 위상이 약해진 박 대통령 처지에서 ‘일본 리스크’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한·일 관계에 놓인 장애물이 이처럼 높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미·일 3각 협력’을 재촉하고 있다는 점이 박근혜 정부의 두 번째 고민이다.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은 22일 “한·일 관계가 더 넓고 깊은 관계로 진전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일 관계의 복원은 곧 중국을 견제하는 ‘3각 협력’의 복원이라고 보는 미국의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미국은 말뿐만이 아니라 한·미·일 안보협력으로 가는 행동에 돌입했다. 우선 지난해 서명한 ‘한·미·일 정보공유 약정’에 따른 북한 정보의 공유가 최근 시작됐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한·일 관계 경색으로 그간 이행하지 못했던 일을 미국 주도로 시작한 것이다. 또 올 하반기에는 한·일 국방 당국의 정책실무회의가 열리고,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가 참가하는 수색·구조 훈련도 있을 예정이다.
이처럼 한·일 관계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한·미·일 관계의 진전이 빨라지며 나타나는 보폭의 차이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한·일 군사정보협정을 몰래 추진하다 들통 났던 식의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이 속도조절을 하려 할 경우 ‘한·일 국교정상화 기념식을 모양새 좋게 치를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딴소리한다’는 미국의 추궁을 들을 수도 있다.
미국이 밀어붙이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도 섣불리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정부의 세 번째 고민이다. 중국은 뒷짐 지고 보고만 있지 않고 한국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질문을 던진다. 9월 3일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에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이 참석하면 한·일 관계에, 불참하면 한·중 관계에 상처를 준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할 것인가’ ‘미국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의 한반도 배치에 찬성할 것인가’ 등에서 갈팡질팡했던 한국이 또 다른 시험에 든 셈이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2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모양새 좋았던 기념식이 향후 외교에서 정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