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미국 내 최고의 이란 문제 전문가들이 발표한 공동성명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과 이란의 30년 적대관계를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바마 당선자에게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며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국내 전문가들의 논리와 너무도 흡사해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다시 찾아보니 주로 이런 대목들이었다. “대화를 하는 데 전제조건을 두지 말라. 핵문제는 다른 분야에 관한 대화를 병행하며 풀어야 한다. 미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이란 사이의 최대 쟁점인 핵문제를 서로 대화하고 관계를 주고받는 길의 ‘입구’에 두지 말라는 얘기다.
그들이 이란 정권을 예뻐해서 잘 살게 해주려고 한 제안이 아니었다. 이란이 쥔 주먹을 펴게 함으로써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제안이 즉시 행동으로 옮겨지진 않았지만, 7년 가까이 밀고 온 결과 이란 핵협상은 지금 최종 타결을 목전에 두고 있다.
두 나라 사이의 가장 첨예한 갈등 요소를 관계의 입구에 갖다놓아선 안 된다는 원리는 현재의 한·일 관계에도 적용된다. 그간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그 전제조건을 치우려 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유흥수 주일대사가 20일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이 정상회담 성사의 전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50년 한·일 관계의 근간을 건드리는 사안이어서 정상회담 같은 최고위급 외교를 통해서만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이 ‘역사 왜곡 드라이브’를 워낙 심하게 걸다 보니 정부로서도 그간 강경한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냉정을 되찾아야 할 때다.
그 원리는 이제 남·북 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핵문제가 풀려야 교류·협력이나 대북지원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선(先)핵폐기론. 북핵 6자회담을 열어 합의한 후에 이행해야 하는 사항들을 북한이 먼저 이행하고 나와야만 6자회담을 열 수 있다는 전제조건론. 이명박 정부 이후 7년 반 동안 고수해오는 이 아집은 문제 해결의 길이 아님을 미·이란 관계와 한·일 관계가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핵 능력만 점점 커지게 하는, 매우 위험한 방관일 뿐이다. 북한 정권을 예뻐해서 잘 살게 해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다.
황준호 통일외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