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다음달 3일 베이징에서 개최하는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기념행사를 둘러싸고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외교 각축전이 치열하다. 각국은 정상의 전승절 행사 참석 여부 등을 통해 장기적인 전략이나 이익을 투영시키는가 하면 단기적인 정세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경전도 이번 행사를 계기로 벌어지고 있다. 2차 대전 종전 70년을 즈음해 일어나는 동북아 지각 변동이 중국의 전승절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고심 끝에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동북아의 정세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박 대통령의 참석을 강력히 희망해 온 중국과, 공개적으로는 ‘한국의 주권 사항’이라고 하면서도 박 대통령의 불참을 내심 바라고 있었을 미국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중국의 손을 들어준 셈이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질서의 변동을 예고하는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도 지난 3월 참여를 선언한 한국은 ‘중국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승절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미동맹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미국이 가진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마저 무기한 연기시킨 한국의 보수 정권이 중국에 ‘기울어진’ 결정을 잇달아 내린 것은 미국 입장에서 뒷짐 지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상황 전개다. 한·미·일 3각 군사협력 체제를 구축해 중국을 견제한다는 구상이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기념행사가 ‘항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으로 한국과 중국이 대 일본 공조를 꾀하는 듯 비춰지는 것도 미국으로선 편치 않다.
박 대통령은 전승절 행사의 핵심 순서인 중국 인민해방군 열병식에도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중국의 군사적 ‘굴기’(우뚝 일어섬)를 상징하는 행사에 한국의 국가 원수가 처음 참석하는 것은 결국 한국의 장기적인 국익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북한의 경우는 전승절을 계기로 단기적인 정세 주도권을 잡아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우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행사 참석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김 제1위원장이 방중을 계획하고 있을 경우 나타나야 하는 북·중 고위급 접촉이 최근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김 제1위원장 역시 다자 정상회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많다.
또 지난 5월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러시아 정부의 강한 요청을 뿌리치고 끝내 불참했던 김 제1위원장이 중국의 전승절에 참석하는 것은 북한의 외교 전술과도 맞지 않는다. 최근 몇 년 간 북한과 가까운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다. 중국은 김 제1위원장의 참석을 희망한다는 뜻을 러시아만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상황을 종합할 때 북한은 러시아 전승절 때와 마찬가지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베이징에 보낼 가능성이 높다.
대신 북한은 중국이 이번 행사에 크게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들의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외교 목표는 2013년 3차 핵실험과 장성택 처형 이후 악화된 북·중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김정은 정권의 공고화를 위해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유도하는 것이다. 다만 그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매우 ‘북한적인’ 방식이다. 휴전선 포격 도발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높인다거나 장거리 로켓 발사 움직임을 보이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를 통해 북한은 전승절 잔치를 성대히 치르고자 하는 중국의 중재나 지원 등 유화적 행동을 이끌어 내려 한다는 분석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의 20일 사설을 보면, 전승절을 준비하는 중국이 북한의 긴장고조 행위 가능성에 크게 신경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환구시보>는 이 사설에서 "축제(전승절 기념행사)를 앞두고는 논쟁도, 분쟁도 하지 않는 것은 중국의 전통”이라며 “외부의 누군가 그럴 준비를 하고 있다면 시간을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사설은 이날 오후 북한의 대남 포격 도발이 있기 전에 인터넷판에 올라간 것이어서 화제가 됐다. 중국 외교부의 우다웨이 한반도사무특별대표는 21일 황준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의 통화에서 “중국은 현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남·북한뿐 아니라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의 속내는 복잡하다. 아베 신조 총리는 중국의 초청을 받은 상태이지만, 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 일본 총리가 참석하는 것은 마치 무릎을 꿇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어 주저할 수밖에 없다. 또 아베 총리의 종전 70년 담화를 들은 중국이 “진정한 사과를 하라”고 강력히 비판한 마당에 그 당사자가 전승절 행사에 참석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다만 중국과 갈등하면서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두 번 했던 아베 총리가 3일 열병식을 피해 방중해 중·일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 경우 박근혜 대통령, 시진핑 주석, 아베 총리 사이의 3각 대화가 이뤄지면서 연내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가 급물살을 탈 가능성도 있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중국은 내달 3일 전승전 기념행사에서 병력 1만2000명이 동원되는 열병식을 벌일 예정이다. 지난 1일 베이징의 한 군부대에서 열병식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