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실력 없는 의사를 만나지 않기 위해

입력 : 2015-09-03 오전 9:40:18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실력 없는 요리사를 만나면 한끼 식사를 망치고, 실력 없는 변호사를 만나면 돈을 손해 본다. 그러나 실력 없는 의사를 만나면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 실력 없는 의사가 배출되지 않도록, 제도적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다.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설립하려면 먼저 미국 의학교육 평가기관인 LCME(Liaison Committee on Medical Education)의 신설의대 평가기준에 따라 평가 및 인증을 받아야 한다. 인증 후에야 신입생을 모집할 수 있다. 신입생을 모집한 후에도 해당 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학교가 원래 제시한 계획대로 충실하게 의학교육을 하고 있는지를 매년 인증 받아야 한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경우 대학 설립이 취소되고, 기존 학생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한다.
 
우리나라 사정은 어떨까. 국내에도 LCME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한국의학평가원(의평원)이라는 기구가 있다. 그러나 사정은 사뭇 다르다. 한 의과대학이 있다. 1995년 설립된 이 대학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평원이 시행하는 의과대학 인증평가를 통과하지 못했다. 2007년 이후에는 인증평가 자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이 의과대학은 세계의과대학 목록에도 등재되지 못했고 해당 의대를 졸업한 의사는 대한민국 의과대학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나라의 의사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의과대학 졸업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수들은 없다시피했고, 수련병원이 폐업하여 임상실습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학생들은 교육위탁을 받은 병원에 파견을 나갔으나 학생들 실습을 담당해줄 전공의도 전혀 없고 의료진과 마취과 의사도 턱없이 부족해, 외과의 경우 1년에 불과 50~60례의 수술만 가능했다. 이는 일반 대형병원의 하루이틀 수술건수에 불과한 수치다.
 
그리고 2012년 9월, 이 의과대학의 설립자는 1천억원가량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2012년 감사를 받았다. 감사보고서에는 '환자는 없고, 병실은 자물쇠로 잠겨있고, 시설물 곳곳은 거미줄로 둘러싸여 있었고, 응급실과 수술실에는 간호사도 없는 실정으로 50년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실정이었다’라고 기록됐다. 결국 2013년 1월 부실한 의학 임상실습을 했다는 이유로 대학을 졸업한 134명에게 의학사 학위 취소 명령이 내려졌고, 일부 재학생들의 학점도 취소됐다. 이미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134명의 의사들이 의사면허 취소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5개월이 지난 2014년 6월, 법원은 교육부의 취소명령이 위법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134명의 의사들은 구제 받았지만, 이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전북 남원에 있는 서남의대 얘기다. 이후 전주예수병원과 명지병원, 부영건설 등이 서로 인수를 위해 각축을 벌이다가 2015년 6월 정식으로 명지병원에 인수됐다. 서남의대는 1995년 설립 이래 단 한 번도 의과대학 인증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13년 12월 겨울 영하의 날씨 속에 관동의대 학부모들이 서울 이촌동에 있는 대한의사협회 회관 마당에 텐트를 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명지학원과 관동대는 의대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학부모들이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 야외 단식농성에 돌입한 이유는 명지학원과 관동대가 무려 19년째 부속병원을 확보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동대는 다른 병원들과의 위탁수련교육 계약을 통해 편법으로 부속병원 설립의 의무를 피해왔다.
 
그러던 중 명지병원과의 계약이 파기된 후 학생들이 광명성애병원으로, 다시 프리즘병원으로 떠돌게 됐는데, 교육부가 프리즘병원을 수련병원으로 인가하지 않자 서남의대처럼 부실교육에 따른 학점 및 학위취소 사태가 생길 것을 우려해 농성에 나선 것이다. 2014년 6월, 관동대는 국제성모병원을 수련병원으로 하는 인천가톨릭학원에 인수됨으로써 사태는 마무리됐다.
 
부실 의대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서남의대와 관동의대가 각각 명지병원과 국제성모병원에 흡수되면서 부실교육이라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간신히 찾게 됐다. 문제는 비단 이들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러 신설 의대들이 여전히 떠안고 있는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역구에 의과대학 신설을 또 다시 추진하고 있다.
 
교회는 천막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의과대학은 그래서는 안 된다. 서남의대와 관동의대 모두 부속병원의 설립을 계획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의대 신설을 위해서는 의사 증원의 타당성이 입증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의학교육을 뒷받침할 수 있는 병원과 교수 등 인적 자원의 마련이 반드시 선결되어야 한다.
 
부실교육의 직접적 피해자는 부실교육을 받는 당사자이겠지만, 가장 큰 피해는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맡겨야 하는 환자들이다. 지금 대한민국 의료상황은 의과대학 신설을 논할 때가 아니라, 의과대학의 질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훨씬 더 시급하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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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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