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페미니즘은 없다

입력 : 2015-10-26 오후 7:16:17
2014년 9월,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엠마 왓슨의 연설이 있었다. UN의 여권신장 캠페인 ‘HeForShe’를 지지, 독려하기 위해서다. 페미니즘이 남성혐오와 동일시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고정된 성역할에서의 해방을 위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적극적으로 캠페인에 참여해주기를 부탁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물론 전 세계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에 동참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사진/바람아시아
 
그의 영향력은 실로 커서, 1년이 지난 지금도 왕왕 회자되며 여권운동 공론화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백인 여성이기에 페미니즘의 진정성에 대한 우려와 지적도 존재한다. “당신의 페미니즘은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허마이어니 역을 맡으며 벼려졌을 것”,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말랄라 유세프자이와 비교해 “당신 성장기의 ‘여성스럽지 않음’에 사람들이 별난 눈길을 보낸 것과는 그 경험의 질이 다르”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비교적 차별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백인 여성이 소수자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곳은 곧 전쟁터가 되고 맙니다.’ 양성 불평등 문제를 다루는 기사 댓글 창엔 항상 예언가들이 등장한다. 양성 간의 살벌한 의견 대립을 전쟁터에 빗대는 것이다. 예언가는 아니지만 나 역시 다른 짐작을 할 수 있다. 그곳엔 진짜 페미니즘을 말하는 이른바 ‘진정한 페미니스트 옹호론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사진/바람아시아
 
그들의 주장은 군대 이야기로 시작해서 여자의 의지력 차이에 대한 강조로 끝이 난다. 한국의 여자들은 ‘여성 군입대’는 싫으면서 ‘군가산점제’도 반대하고, 체력과 의지가 약해 불이익 받는 것을 남자 탓으로 돌리려 한다는 점이 주된 논조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면 여성 징병제를 주장하거나 적어도 군가산점제는 찬성해야하며, 여성의 ‘열등한 체력과 의지력’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 어느 나라에 존재한다는 진짜 페미니스트는 한국에는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려진다.
 
언뜻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가정이 잘못됐다. 한국의 ‘페미니스트’가 남성만의 군입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며, 군가산점제를 반대한다는 이론적, 사회적 합의도 없다. 가사노동과 육아를 책임지며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을 볼 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의지력과 체력이 열등한지는 의문이나, 페미니즘이 엄청난 체력 없이도 생활을 위한 노동이 가능한 환경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한 페미니스트 옹호론자’들이 말하는 진짜 페미니즘은 마치 한국의 가짜 페미니즘이 나아가야할 종착지로 둔갑되어지곤 하지만, 실상 현존하는 페미니즘은 물론 여성을 열등하고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깎아내리는 잣대로 이용된다.
 
 
최근 뜨거운 감자인 메갈리아 논쟁에서도 ‘진짜 페미니즘’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메갈리아는 여성 혐오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시키기 위해 미러링(mirroring)을 운동 방법으로 택하고 있는 온라인 조직이다. 만연해 있는 여성 혐오의 폭력성을 차분하게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식인 폭력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자칭 페미니스트인 20대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운동의 전면에 페미니즘을 내세우기도 한다.
 
이에 일각에선 ‘혐오를 혐오한다면서, 결국 남성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자신은 남성이고 지금까지 여성혐오 문제에 심각성은 동감하지만 이것을 혐오로 해결하려는 것은 페미니즘의 원칙과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지금까지의 운동 방향과 다르고, 지속 가능성에 큰 결함을 갖고 있기에 논쟁적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기존의, 고유한 운동 방식인지는 재고해보아야 한다. 페미니즘은 자애와 친절을 기반으로 한 학문이 아니다.
 
 
 
사진/바람아시아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의 창립을 위해 모인 여성 활동가들. NOW는 주로 교육과 법적 소송을 통해 여권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인종과 계급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물론 페미니즘은 어떠한 비판도 허용할 수 없는 성역이 아니다. 실제로 20세기 초 부유한 백인 여성들만의 페미니즘은 흑인을 주축으로 한 빈곤한 다른 인종 여성들에게 비판 받았고, 다른 소수자 문제를 배척하고 양성 간의 권리문제에만 몰두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러한 비판은 여전히 일정 부분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앞선 비판들이 온전하지 못하다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발화를 하는 주체에 있다. 여권을 중심으로 한 소수자 권리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약자, 소수자인 당사자의 입장이다. 정치, 경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구조적 약자의 소외와 불평등 경험에 관한 의견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예컨대 아직도 노예 취급을 받으며 생활하는 흑인 여성이 엠마 왓슨을 향해 던지는 날선 비판은 정당하다. ‘네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너희들만의 페미니즘이다.’
그러나 그 발화의 주체가 한국의 중년 (시스젠더 이성애자일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남성일 경우 의미는 달라진다. ‘너네는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다.’ 그것은 환상 속의 진짜 페미니즘으로 현실의 페미니즘을 재단하는 기득권의 선입견일 뿐이다. 기성세대가 삶에 지친 청년세대에게 ‘그래도 너희는 배곯진 않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잖아’,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그래도 우리나라는 동성애를 법으로 처벌하지 않잖아’라며 전하는 말이 이와 결을 같이 한다. 배는 곯지 않아도, 법으로 처벌 받지 않아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한 요구는 계속 되어야 한다.
 
Feminism은 Feminisms로 쓰여야 한다는 주장이 통용될 정도로 층위와 범위가 다양하다. 이남희는 <젠더와 사회>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공감하고 성별을 비롯한 다양한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을 때, 인간 해방을 완성하는 사상으로서 페미니즘의 의미가 계승될 것’ 이라고 페미니즘의 의미를 폭넓게 열어둔다.
 
평등을 위협하는 자기모순에 빠진 페미니즘은 겸허히 비판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다르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큰 틀을 공유하는 한, 페미니즘에 ‘진짜’ 와 ‘순혈’은 없다. 자칭 페미니스트인 당신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보기에 한국의 페미니즘이 걱정되는가? 그렇다면 훈계는 넣어두길 추천한다. 성장하는 한국의 페미니즘에겐 종종(사실 항상) 훈계보단 말없는 응원이 필요하다.
 
 
송은하 기자 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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