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괴물신인', '충무로의 보석'이라는 수식어가 배우 박소담의 앞에 붙었다. 새 영화 '검은 사제들'을 통해 박소담은 단숨에 자신의 입지를 끌어올렸다. 영화 내적인 호평만큼 관객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500만 관객 동원까지도 조심스럽게 예측되고 있다.
박소담은 김윤석과 강동원이 깔아놓은 판에서 넷 악령에 씐 소녀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소녀 영신을 비롯해 네 마리의 악령을 다른 언어와 목소리 표정만으로 만들어냈다. 1인 5역을 흐트러짐 없이 표현한 그의 모습을 보면 업계의 극찬이 전혀 아깝지 않다.
마치 하루 아침에 확 떠버린 스타같지만, 박소담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고행이 적지 않았다. 지금의 찬사는 힘겨운 노력 끝에 얻어진 결과물이다. 쉽지 않은 여정 끝에 단숨에 유명세를 탄 박소담을 최근 삼청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영화 관계자들의 계속되는 극찬과 예상을 넘어선 '검은 사제들'의 흥행에 다소 얼떨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밝은 미래가 예상되는 박소담의 연기 여정을 들어봤다.
◇"연기할래요"라고 하자 뒷목 잡고 쓰러진 아버지
박소담은 1991년 족발이 유명한 서울의 한 동네의 평범한 가정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잠실로 이사한 후 쭉 그곳에서 살고 있다. 딸한테만큼은 유독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터라 서클활동도 하지 않고 착실한 학생으로 자라왔다. 그러던 중 고1 때 우연히 뮤지컬 '그리스'를 보게 됐다.
"노래하는 걸 좋아했었어요. 뮤지컬을 봤는데 하루 종일 가슴이 뛰고, 그 배우들이 행복해보였어요.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 길은 저기에 있다'고 생각했었죠."
연기자로서의 꿈을 키웠지만 난관이 있었다. 부모님이었다. 1년 반을 넘게 설득을 했다. 어머니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연기자 박소담을 원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공부해서 직장 다니시길 원하신 것 같아요. 이 길로 가면 특별히 도와줄 것도 없고, 너무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하셨대요. 정말 반대가 컸었죠."
아버지에 반대 속에서도 연기에 대한 뜻은 굽히지 않았다. 연기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와 합심해 종합학원을 다닌다는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 몰래 연기학원을 다녔다.
"학원비가 60만원 정도 하는데, 아버지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이것만 하지 않냐. 싼 거다'라고 말하면서 다녔죠. 거짓말을 해서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수시를 통해 연기학과로 유명한 곳에 입시 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당시 자괴감이 컸다고 했다. 우울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합격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연기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저는 그래도 좀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엄청 혼나고 뒷목 잡고 쓰러지셨어요. 정말 제가 연기자가 되는 걸 원치 않으셨어요."
◇한예종, 입학부터 졸업까지
아버지 모르게 연기를 준비했던 만큼, 아버지의 신뢰를 얻기 위해 박소담은 고등학교 시절 이를 악물고 준비했다.
"제가 하고 싶다는 걸 온 몸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진짜 열심히 준비했어요. 이름 값이 있는 대학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고요."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한 박소담은 유명한 대학교 다섯 곳에 입시원서를 냈다. 그런데 모두 떨어졌다.
"눈앞이 캄캄했어요. 우울하고 힘들었죠. 떨어진 친구들과 같이 울었어요. 여기서 떨어지면 정말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한예종에 원서를 넣었어요. 면접을 보는데 실기거든요. 연극 '잘자요 엄마'에 나오는 부분을 연기했는데 붙은 거예요. 날아갈 것 같았어요. 비록 아버지는 뒷목을 잡고 쓰러졌지만 말이에요."
동기인 김고은이 입학하자마자 영화 '은교'에 출연하고, 친구들 역시 휴학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박소담은 휴학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이 즐거웠고, 차라리 빠르게 졸업을 해서 빨리 사회에 나가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정말 오고 싶었던 예술학교 중에서도 좋은 학교잖아요. 학교 생활은 정말 재밌었어요. 여유도 있었고, 저를 개발하는 시간도 있고, 뭔가 배우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학교 다니는 동안 연극 네 편이랑, 단편 영화를 찍었어요. 아르바이트도 했었는데, 나중에는 공연에 촬영까지 하다보니까 아르바이트 할 시간도 없었어요. 그냥 다 재밌었어요. 촬영도 재밌고, 새롭게 사람을 알아가는 것도 재밌고요."
'잉투기'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 사진/무비꼴라쥬
◇'잉투기'를 만나다
무대에 서는 배우가 되길 희망하고 학교에 입학한 박소담은 계속해서 무대만 바라봤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자신의 얼굴이 카메라와는 전혀 어울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치 않게 단편 영화에 출연하게 됐고, 의외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연기도 하면서 촬영이 준비될 때는 놀기도 하는 현장이 즐거웠고, 연기도 더 세심하고 디테일하게 해야하는 점이 더 좋았다고 한다. 또 한 작품 한 작품 모두 추억을 쌓아가는 것도 행복감을 주는 요소였다고 한다.
추억을 쌓아가던 어느날 한예종과 교류가 있었던 한국영상원의 엄태화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잉투기' 출연 때문이었다. '잉투기'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싸우게 된 청춘들의 이야기를 재기발랄하게 풀어낸 영화다. 박소담은 극중 연희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는 예상 외의 호성적을 거두며 많은 영화관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졌다. 엄태화 감독은 강동원, 이효제와 함께 '가려진 시간'으로 장편 영화에 입봉한다.
"영상원 졸업작품 두 편에 출연하게 됐어요. 그 이후로 영상원 작품을 많이 찍게 됐어요. 그 시간 모두가 행복했어요."
'베테랑'에 출연한 박소담 스틸컷. 사진/CJ엔터테인먼트
◇류승완·이준익·김기덕, 거장들의 한 목소리
학교를 졸업한 뒤 박소담은 수없이 많은 작품의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하지만 사회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냉정했고 처절했다. 덤벼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았다. 그 때 어머니가 큰 힘이 됐다.
"원하는 대로 일이 잡히지 않고 그러니까 짜증이나 신경질을 부리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 때 어머니가 '세상 일이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고 힘내라'고 하셨는데, 그 말 덕분에 다시 힘을 내게 됐어요."
그런 뒤 언제 위기가 있었냐는 듯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게 된다. 임필성 감독의 '마담뺑덕'을 비롯해 김기덕 감독의 '일대일',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 이준익 감독의 '사도'까지 비록 짧지만 강렬한 역할로 참여하게 된다.
국내를 대표하는 감독들은 박소담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과 희소성이 있는 매력을 담은 그의 외모를 보고 '조선의 눈'이라고도 했고 도화지라고도 했다.
"이준익 감독님은 오디션을 볼 때 바로 그러셨어요. '너가 조선의 눈'이라고요. 제 눈이나 목소리에 대해서도 좋게 평가해주셨어요. 전 정말 얼떨떨했었죠. 류승완 감독님은 저를 도화지라고 해주셨어요. 메이크업이나 분위기에 따라 많은 얼굴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요. 김기덕 감독님도 제 얼굴이 국내 영화계에 보기 드문 매력의 외모라고 자주 보고 싶다고 해주셨어요. 과찬이신 거죠."
실제로 박소담의 얼굴은 다양하다. '검은 사제들'을 통해 공포스러움을 표현해보였다면, '사도'에서는 못되고 얄미운 여자였고, '베테랑'에서는 잠깐이었지만 섹시했다. 드라마 KBS2 '붉은 달'의 화완옹주 역을 통해서는 청순하고 참한 공주의 이미지를 보였다. 온스타일 드라마 '처음이라서'에서는 긴 머리의 단아하고 청초한 느낌의 얼굴을 내비쳤다.
"과연 제가 그렇게 다양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까, 걱정이에요. 많은 기회를 주셔서 그만큼 많은 시도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운이 좋았던 거죠."
영화 '경성학교' 박소담(왼쪽)-박보영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첫 장편·주연,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
공포물에 일가견이 있는 이해영 감독은 오디션에서 만난 박소담의 담백한 마스크와 대사 전달력, 감정 해석력 등이 높은 수준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는 여주인공 연덕 역에 캐스팅했다. 박소담은 주란 역을 맡은 박보영과 극을 이끌었다.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지는 1938년 한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연덕은 소녀들을 이끄는 급장이다.
박보영의 친구로만 생각했던 관객들은 의외의 뚜렷한 존재감에 박소담이라는 이름을 머리에 각인시켰다. '충무로의 보석'라는 수식어는 이 때부터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만큼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데는 제작진의 배려가 있었다.
"단편 영화를 많이 찍어서 현장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첫 장편이고 첫 주연이어서였는지 부담이 많이 됐었던 거 같아요. 중요한 역할인데, 잘 끌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부담감이 컸어요. 잘하고 싶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있었어요. 초반 3주에서 한 달은 현장을 편하게 즐기지 못했어요. 반대로 박보영 선배는 순간적인 집중력과 몰입도가 뛰어났어요. 전 보영 선배처럼 할 수 없어서 감독님께 시간을 좀 줄 수 있냐고 여쭤보기도 했었어요. 엄지원, 박보영 선배를 비롯해 모든 스태프들이 내가 좋은 연기를 펼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배려를 해줬어요. 덕분에 한 달의 적응기간이 끝난 뒤에는 편하게 현장을 누볐던 것 같아요."
◇박소담을 '충무로의 보석'으로 만든 '검은 사제들'
박소담은 시나리오 때부터 호평이 자자했던 '검은 사제들'의 오디션 장으로 향한다. 오디션 당시 그는 '사자 울음소리', '크하하하하항' 등 알 수 없는 문장을 연기했다. 오디션 자체도 난감했었다고 한다. 오디션 중에 격한 감정이 차올라 눈물을 흘리기도 했단다.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쏟아냈었다고 한다. 힘겨웠던 3차 오디션까지 끝나고 박소담이 영신 역할을 맡게 됐다.
"제가 해왔던 역할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이잖아요. 또 장르적으로도 독특하고 그러면서 상업성도 있고요. 저도 무서운 걸 잘 못 보거든요. 어떻게 이 역할을 이해시키느냐가 다 관건이었죠."
박소담 혼자 책임을 짊어지기 어렵다고 느꼈는지 장재현 감독과 김윤석, 강동원이 무게를 나눠 가져갔다. 끊임없는 배려와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김윤석은 촬영지였던 광주에서만큼은 박소담의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힘들 수 밖에 없었다.
"에너지 소비가 심하잖아요. 다락방이라 공간도 제한돼 있고요. 손과 발도 묶여있고요. 한 동안 이상한 꿈도 꾸고 우울했어요. 아마 윤석 선배랑 동원 선배가 아니었으면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제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용기를 주셨어요. 손에 상처라도 날까봐 계속 신경써주시고요. 촬영이 끝나면 맥주 들고가서 한 잔씩 하고요. 제가 온전한 정신을 갖고 촬영할 수 있었던 게 컸어요."
주위의 배려로 인해 역대급 캐릭터가 탄생한다. 악령 넷에 씐 소녀 영신이다. 라틴어, 독일어, 중국어, 한국어를 통해 네 악령을 표현하고 그 안에서 권위와 공포, 비아냥, 조롱 등의 감정을 표출한다. 악령마다 제각각의 성격과 감정이 있음을 내비친다. 실제 영신까지 합해 총 다섯 인물을 소화했다.
"라틴어는 위엄있는 낮은 목소리였고, 중국어는 톤이 높아지면서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느낌을 냈어요. 독일어는 무섭게 힘을 줬고, 한국어는 섬뜩함을 주려고 했어요. 제가 보여줘야 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해서 철저히 계산했어요."
박소담은 '검은 사제들'을 위해 삭발을 감행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박소담은 작품을 위해 삭발을 감행했다. 쉽지 않은 결정일 수 밖에 없다. 연기를 떠나 배우로서의 태도도 훌륭하다는 걸 보여준 한 사례다. 선배 김윤석은 박소담의 이 점을 기특하게 여겼다.
"삭발은 당연히 걱정이 컸죠. 여자잖아요. 다른 작품도 해야되는데 못할까봐 걱정도 됐고요. 예쁘지 않은 머리카락을 보면서 우울해질까봐 걱정했죠. 그런데 고민 끝에 삭발하기로 마음 먹은 뒤에는 쉽게 넘어갔던 것 같아요. 또 지금 아니면 언제 밀어보겠어,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어떤 얼굴이든 믿음을 주고 싶어요"
박소담에게 있어 '검은 사제들'은 이름값을 알린 계기가 됐지만, 배우로서 책임감과 작품에 임하는 태도 등을 생각해보게 하는 성장 기회가 되기도 했다. 김윤석과 강동원의 에너지를 어깨너머로 배운 덕이었다.
"김윤석, 강동원 선배는 누구보다도 이 작품을 완벽히 이해하고 준비했어요. 자신이 이해를 못하면 관객도 이해시킬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었어요. 다들 알고는 있는 부분이지만, 그걸 수행하는 건 또 다른 거 같거든요. 그 대선배들도 대본을 놓지 않으시고, 더 재밌고 훌륭한 작품을 만드려고 계속 노력하셨어요. 영화는 관객들이 돈을 내고 보는 콘텐츠잖아요. 실망을 시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걸 배웠어요."
배우로서 안팎으로 성장하고 있는 박소담의 목표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어떤 캐릭터, 어떤 얼굴을 보여주든 '박소담'이란 이름에 신뢰감을 쌓는 것이다.
"영신이란 인물 자체를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상상하기도 어려웠고, 레퍼런스가 없었기 때문에요. 그런 실험이었음에도 흥행을 했다는 건 어느 정도 저의 모습을 이해하셨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떤 작품이든 캐릭터든 많이 해보고 싶은데, 어떤 모습으로 나오든 저를 이해하고 믿어줄 수 있는 연기력을 보이고 싶어요. 머리가 짧아졌으니 강렬한 액션 연기도 해보고 싶고요, 진한 멜로도 그려보고 싶어요. 중요한 건 언제나 믿음을 주는 배우의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혜성처럼 충무로에 나타난 박소담은 현재 차기작을 고르는 중이다. 액션이 될지 멜로가 될지 혹은 코믹이 될지 모르지만, 무엇을 고르든 충무로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배우로서 착실히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박소담이 그리는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