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세이)감동적인 '반전스토리'의 미학

입력 : 2015-12-02 오후 5:22:25
[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2010년 개봉한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는 감동적인 스포츠 영화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약물 중독자 엄마에게서 태어난 마이클 오어는 '리 앤' 가족의 품에서 자라 미국 최고의 프로미식축구(NFL) 선수가 된다는 게 대강의 줄거리다. 이 반전 스토리의 힘은 흥행 대박으로 이어졌다. 작품은 미국에서 성공하는 것은 물론 국내에서만 누적 관객 수 35만5516명을 기록했다.
 
이 영화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현실 속에서 소재를 따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흑인 빈민가의 아이가 미국 최고의 스포츠로 불리는 NFL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며 가슴 뭉클해했다. 그리고 영화가 NFL 현역 선수인 마이클 오어의 과거사로 알려지자 감동은 영화관 밖에서도 증폭했다.
 
2010년 볼티모어 레이븐스에 1순위로 지명된 오어는 5년간 우리 돈 157억원에 달하는 연봉 계약을 맺으며 데뷔해 지금까지도 선수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그의 포지션인 레프트 태클은 팀의 두뇌와도 같은 쿼터백을 보호하는 게 임무다. 영화의 제목인 '블라인드 사이드'는 미식축구에서 쿼터백이 볼 수 없는 사각지대를 뜻한다.
 
스포츠의 가치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바로 감동이다. 그리고 감동의 이면에는 항상 '반전'이라는 요소가 녹아 있다. 예를 들면 한 평범한 사람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축구를 하다 끝내 최고의 선수가 된다는 식이다. 삶의 명암을 품은 이같은 반전 스토리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데우곤 한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의 실제 모델인 마이클 오어(가운데)와 그의 가족들. 사진/미국 오하이오주 언론 콜럼버스 디스패치 보도 캡쳐
 
◇노동자 바디의 동화 같은 이야기
 
최근엔 레스터시티의 제이미 바디가 그 역할을 했다. 바디는 지난 주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자신의 반전 스토리로 수놓았다.
 
바디는 지난 29일 맨유와의 경기에서 골을 터뜨리며 11경기 연속골 신기록을 세웠다. 2003년 맨유 소속이던 루드 판니스텔루이가 세운 기록을 깨는 동시에 최고 수준의 골잡이로 올라섰다. 바디의 득점이 터지자 판니스텔루이는 트위터를 통해 "잘했어 바디, 이제는 네가 넘버원이고 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다.
 
주목 받고 있는 건 그의 과거사다. 8부 리그를 전전하던 바디는 30만파운드(약 5만원)의 주급을 받으며 낮에는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다 겨우 기회를 잡은 게 5부 리그 할리팍스타운과 플릿우드타운 구단으로의 이적이었다. 바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며 이를 발판으로 2012년에서야 비로소 2부리그에 있던 레스터시티의 유니폼을 입었다.
 
지난 시즌 레스터시티의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이끈 그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도 여전히 골 폭풍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 공격수로 성장했다. 30만파운드였던 주급은 4만5000파운드(약 8000만원)까지 치솟아 더는 공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 수 있게 됐다.
 
◇공장 노동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공격수로 거듭난 제이미 바디. 사진/레스터시티 공식 페이스북
 
◇비쩍 마른 '황새'가 최고의 공격수로
 
'인간 극장'으로 불리는 찰리 오스틴의 이야기도 있다. 오스틴 또한 부상을 극복하고 벽돌공과 8부 리그 선수생활을 병행하며 끝내 프리미어리거 선수가 됐다. 그가 어릴 적 우상인 존 테리의 수비를 따돌리고 골을 넣었을 때 그의 어머니 카렌 오스틴이 먼저 나서서 트위터에 "내 아들이 존 테리를 상대로 뛸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라고 감격스러워 했다. 이후 오스틴이 간직해 온 어릴 적 테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영국 현지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많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받았다.
 
국내로 눈을 돌려도 이러한 일화는 몇 가지가 쉽게 떠오른다. 올 시즌을 끝으로 포항 지휘봉을 내려놓은 황선홍 감독은 엄마 없이 형, 여동생과 함께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컸다.
 
황 감독은 과거 청소년기에 재회한 아버지가 사준 비닐 축구화를 품에 안으며 "축구가 엄마였다"고 생각했다는, 외로움에 사무친 회고를 한 바 있다. 이런 반전스토리는 국내 최고의 공격수, 성공한 감독이란 평가에 인간미를 불어넣었다. 못 먹어서 비쩍 말랐다는 조롱에 가까운 웃음거리에서 시작된 '황새'라는 별명은 이젠 국내 최고의 공격수이자 성공적인 축구인을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귀공자 풍의 외모와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던 축구 선수 안정환이 실은 외가의 성을 따랐다는 것과 할머니 품에서 어렵게 자랐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반전스토리다. 그래서 그가 청춘FC를 맡아 축구 '미생'을 이끌었을 때 더 많은 지지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 밖에도 야구로 넘어가면 '연습생 신화'의 원조인 홈런왕 장종훈과 지난해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에 오른 연습생 출신의 서건창 등이 있다. 프로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은 이제 한국 프로야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반전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최고의 공격수 출신이자 성공한 축구인으로 꼽히는 '황새' 황선홍 감독. 사진/포항스틸러스
 
◇그들이 우리 옆에서 다시 태어날 때
 
반전스토리에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는 그 순간 스포츠 스타 혹은 스포츠와 우리의 심리적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저들도 현실의 우리처럼 어려움을 겪거나 혹은 겪고 있으며 그런 것을 극복하고 성공했다는 동질감이 그 안에서 싹튼다. 이런 동질감은 지금 현실 속의 '나'도 힘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라는 이름의 씨앗을 뿌린다.
 
심리적 장애물이 허물어질 때 스포츠는 하나의 미학적 가치를 지닌 세계로 넘어간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문학 교수인 한스 U. 굼브레히트는 저서 <매혹과 열망>에서 "가끔은 일상 속에서 나 자신과 내 스포츠 영웅 간의 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스포츠 관전을 통해 저 아름답게 변신하는 육체들과 갑자기 하나가 되어버릴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인문학자가 스포츠를 향해 내놓은 의견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 인문학자의 눈에도 운동선수는 보수적인 규칙과 틀 속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찬사를 받는다. 이는 현실에서 삶의 이런저런 고비를 넘어 나가며 저마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애쓰는 각자의 노력과 비견될 만하다.
 
굼브레히트 교수는 스포츠와 일상을 비교하며 "서로 다른 스포츠의 규칙들은 암묵적으로 한 선수가 경쟁하고 승리하려는 노력과 관람객이 아름답다고 여길 만한 동작을 결정한다"며 "스포츠의 규칙은 운동경기를 일상으로부터 완벽히 분리하는데 일상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규칙들이 오히려 경기에 강하게 몰입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이 된다"고 일갈했다.
 
그의 말에 덧붙이자면 일상과 무관한 듯한 경기에의 몰입에다 일상과 관련한 반전 스토리가 겹쳐질 때 스포츠 스타는 우리 옆에서 다시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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