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세이)'낭만파' 축구팀에 열광하는 이유

입력 : 2015-12-30 오후 2:44:07
[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지난 5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축구장에서 "요즘은 낭만이 없어, 낭만이. 죄다 튀어서 돈만 벌려고 한다니까"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수도권 모 챌린지(2부리그) 경기장이었다. 다가가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요즘 선수들이 돈은 엄청나게 벌면서 옛날 선수들처럼 뛰지 않는다"는 푸념이 돌아왔다.
 
그저 흘러간 얘기나 추억을 떠올리는 말처럼 적당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머리에서 낭만이란 단어가 맴돌았다. 사전에서 낭만의 정확한 뜻을 찾아봤다.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 또는 그런 심리 상태로 감미로운 분위기'라고 명시돼 있었다.
 
생각이 번졌다. 요즘 축구에 낭만이란 과연 존재할까.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낭만적이려면 튀면 안 되고 돈 벌려고 하면 안 되며 옛날 선수들처럼 열심히 뛰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축구가 산업이 되기 이전의 시대처럼 말이다.
 
이런 기준으로 축구계 '낭만파'를 찾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팀이 있었다. 바로 K리그 챌린지에서 극적으로 클래식(1부리그) 승격을 이룬 수원FC다. 수원FC는 올해 예산 50억원으로 최초의 시민구단 승격이라는 성과를 올렸다.
 
이름도 생소한 선수들은 오로지 승격만을 위해 뛰었다. 그들은 많은 연봉을 받지도 않았다. 개인으로는 절대 상대를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준비했다. 조덕제 감독의 지시에 따라 한 발 더 뛰는 데 주력했다. 특히 리그가 끝난 뒤 이어진 승강 플레이오프에서는 전방부터 뛰고 또 뛰어 상대를 압박하는 체력전을 고수했다. 수원FC 선수단의 똘똘 뭉친 기운과 최선을 다해 이기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은 고스란히 결과로 이어졌다.
 
◇개인보다는 팀, 팀보다는 식구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수원FC가 내년 시즌 K리그 클래식(1부리그) 승격을 확정했다. 그들에겐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수식어가 수차례 따라 붙었다. 사진/프로축구연맹
 
유럽으로 눈을 돌려도 낭만파는 살아있다. 요즘은 레스터시티다. 이 팀은 지난 30일 새벽 개인 재산이 수십조에 이른다는 만수르 구단주의 팀 맨체스터시티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만들었다. 레스터시티는 올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돌풍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조건을 보면 전형적인 낭만파다.
 
공장에서 일하던 8부 리거 출신의 제이미 바디가 최전방 공격수로 골을 뻥뻥 터뜨리고 있다. 고작 35만 파운드(약 6억원)의 이적료로 레스터시티에 입성한 리야드 마레즈가 측면에서 지원 사격을 하고 있다. 여기에 운동장 전체를 시종일관 뛰어다니는 은골로 캉테까지 보고 있자면 과거 박지성(은퇴)의 새로운 버전을 마주한 것 같다. 이들은 많이 뛰면서도 빠르다. 영국 언론 스카이스포츠의 지난 9월 보도를 보면 EPL 최고 스피드 선수 상위 5명 중 3명이 레스터시티 선수들로 채워졌다. 1위 바디(35.44km/h), 2위 제프리 슐럽(35.26km/h), 3위 마크 알브라이턴(35.00km/h)이 최고 순간 속도를 자랑했다.
 
특히 낭만파의 조건 중 하나인 돈과 관련된 항목에서 다른 팀과 현저히 비교돼 눈길을 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의 말을 들어보면 감이 온다. 라니에리 감독은 맨시티전 이후 전반기를 정리하는 기자회견에서 "다른 팀들은 수영장이 있는 빌라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하실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올 시즌 EPL 38라운드 가운데 절반인 19라운드를 마친 레스터시티는 11승6무2패(승점39)로 아스널에 이어 2위에 올라있다. 특히 전반기에서 2패밖에 없는 팀은 레스터시티와 토트넘뿐이다.
 
◇공장 노동자이자 8부리그 출신 선수에서 출발해 올 시즌 레스터시티의 선두권 싸움을 이끌고 있는 제이미 바디. 사진/레스터시티 공식 페이스북
 
이러한 낭만적인 팀들의 특징은 중립적인 관찰자를 그들의 응원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나와는 관련 없는 수원FC나 레스터시티가 또 다른 나와 관계없는 팀과 부딪히면 아무래도 감정은 수원FC와 레스터시티로 기운다.
 
언더독(Underdog) 현상이 대입된다. 이는 개싸움에서 아래에 깔린(Under) 개(Dog)가 이겨주기를 바라는 심리다. 경쟁에서 뒤지는 쪽에게 동정표가 몰리는 현상이다. 스포츠 팬들이 패배가 예상되는 존재에 연민을 느낄 때 언더독이란 말이 자주 거론된다.
 
재미있는 건 언더독과 반대되는 개념도 대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일어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가 그 예다. 이는 남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쌤통이다", "고소하다"고 말하며 속으로 쾌감을 느낄 때 설명되는 단어다.
  
승격에 성공한 '낭만파' 수원FC는 내년에 90억원 안팎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약 2배 가까이 늘어난 돈을 만지는 셈이다. 레스터시티도 다가오는 1월 겨울 이적시장에서 공격적인 선수 보강이 예상된다.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은 레스터시티를 향해 "지금 대단한 기회를 잡았다. 결국 돈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다"며 "좋은 선수를 데려오고 선수단 규모를 늘리면 우승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몸집 불리기가 기대되는 동시에 얼마 남지 않은 낭만파가 사라질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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