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배우 이성민은 대구 연극무대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대학로 극단 '차이무'와 충무로를 거쳤다. 드라마와 영화 등 수 십 편의 작품에서 크고 작은 역할과 직업을 넘나들었다. 오랜 기간 무명으로서 작품으로만 얼굴을 비추던 그는 MBC 드라마 '골든타임'에서 인간적인 의사 최인혁으로 분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골든타임'은 그를 무명배우에서 스타로 발돋움시킨 작품이다. 이후 tvN 드라마 '미생'에서 오상식 과장으로 또 한 번 자신의 입지를 높였다.
이성민의 서민적인 인상과 연기는 "송강호와는 또 다른 지점의 페이소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번 작품 속에서 강렬한 연기를 펼치며 자신의 입지를 높인 그가 새 영화 '로봇, 소리'로 원톱 주인공으로 나선다. 10년 동안 실종된 딸을 찾아나서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상대역은 사람이 아닌 로봇이다. 다소 모험적인 소재임에도 그는 최고의 연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주인공으로 나서다보니 부담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며 크게 걱정했다는 이성민이 연기자로서 살아온 발자취를 들어봤다.
배우 이성민. 사진/호두앤유 엔터테인먼트
"아버지와 치열하게 싸우고 쟁취한 연기"
영화 '로봇, 소리'에서 이성민이 맡은 역할을 딸 유주(채수빈 분)를 잃은 아버지 해관이다. 딸이 살아있을 때 해관은 늘 딸과 싸웠다. 딸이 평범하게 직장에 취업하길 바라는데, 음악을 하고자하니 그게 못마땅한 인물이다. 2016년 이성민은 음악을 하려는 딸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표현했지만, 약 30년 전 이성민은 유주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연극을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 경험이 있다.
"저는 연기할 성격이 못돼요. 아주 극심하게 내성적이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상상도 못했죠. 그냥 영화를 많이 좋아했었어요. 아버지가 영화를 좋아했거든요. 아버지가 '주말의 영화'를 같이 안 보면 재우질 않으셨어요. 그게 몸에 뱄죠. 재수할 때 연극영화과가 있다는 걸 알고 부모동의 없이 지원했었어요."
아버지에게 허락을 맡으러 가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바로 지원서를 찢어버렸다. 방위산업체에 가서 기술을 배우라고 재촉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이성민은 군대를 가게 됐다.
"군대 제대하고는 다시 연극을 시작했어요. 그 때 아버지랑 1년 정도 안 보고 지냈어요. 그러다가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있어서 연극을 안 했어요. 대구에서 극단 생활을 하다가 고향인 영주로 내려갔죠. 그 때 나이가 스물여섯이었어요. 집에 가니까 난리가 난 거죠. '너 뭐 할 거냐고'요.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게 맞죠. 연기만 하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소위 '노가다' 좀 하다가 연극을 다시 했어요. 그 이후로 서울에 올라와서 연극생활을 하다가 TV에 출연하게 된 거예요."
배우 이성민. 사진/뉴시스
"송강호와는 또 다른 지점의 페이소스"
배우 송강호는 국내 최고의 연기파 배우이자 서민 연기를 가장 잘하는 배우로 통한다. 일반 서민부터 인권 변호사까지 어떤 위치에 있든 송강호의 얼굴은 현실적이고 서민적이다.
이성민 역시 송강호와 결을 같이 한다. 전문직 의사였던 '골든타임'의 최인혁도, 새빨간 눈의 워커홀릭인 '미생'의 오상식 과장도 우리네 옆에 있는 사람 같다. 이번 '로봇, 소리'의 해관 역시 전형적인 우리 아버지 같은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이성민과 송강호는 극단 '차이무'의 선후배 사이다. 송강호가 선배다. "이성민에게는 송강호와는 또 다른 지점의 페이소스가 있는 것 같다"고 말을 건넸다. 이성민은 정말 기분 좋다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송)강호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강호 형의 뭐랄까, 그 친근함이나 일반 시민의 눈높이의 연기랄까요. 극단 시절부터 저한테 좋은 영향을 줬었고, 저 역시도 그처럼 연기하려고 하는 게 있어요.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 보통 사람들이 품어줄 수 있는 느낌,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아래에 있는 인물 같은 연기요. 관객들로부터 측은지심이 느껴지는 인물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인혁도, 오상식도, 해관도 조금은 모자란 느낌이 들잖아요."
배우들은 맡은 캐릭터에 접근할 때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인물의 직업에 맞춰서 디테일을 살린다거나, 인물의 감정선에 집중한다거나. 이성민은 그 사람의 본질에 충실하려는 편이라고 했다. 직업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고, 평범한 인물처럼 접근하려고 한다는 의미다. 어떤 직업이든 현실적이고 평범한 인물을 그려낸다고 한단다. "강호 형과 비슷한 듯 다르다는 말은 참 기분이 좋네요. 형의 정서가 저에게도 있을 것 같거든요. 평범함 속의 비범함, 그리고 강렬함을 표현하고 싶어요."
영화 '로봇, 소리'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나에게 화두를 던진 작품은 '하울링'"
80년대 중반부터 연기를 시작한 이성민은 20여년을 돌고 돌아 전 국민이 알 정도로 유명한 연기자가 됐다. 주로 주인공을 지원하는 역할을 도맡다가 원톱 주인공으로까지 치고 올라왔다. 오랜 연기 경력이 있는 그에게 가장 큰 화두를 던진 작품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하울링'이라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하울링'은 이나영과 송강호가 출연했고, 유하 감독이 연출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당시 송강호가 예전만 못하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결과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이성민은 '하울링'을 주저 없이 꼽았다.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요. 그 때 연기를 계속 해야 되나 고민도 많았어요. 유하 감독이 굉장히 자극적으로 저에 대해 뭐라 하셨어요. 정말 저를 정확히 본 것 같았어요. 매일 밤 옥상에 올라가 고민했었습니다. 강호 형과 본격적으로 마주쳐야 하는데 엄청 후달렸어요. 내 문제가 뭔지 정확히 진단하게 됐죠. 그 시련을 통해 저만의 우울함을 깨우쳤어요. 유하 감독은 고마운 사람인 거죠."
"도대체 유하 감독이 뭐라 한 건가"라고 재차 물었지만, 이성민은 "영업 비밀"이라며 밝히지 않았다. "제 문제를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만난 시련에 대한 반가움은 있어요.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 이성민과 '로봇, 소리'를 연출한 이호재 감독이 논의를 하고 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꿈을 이뤘다'는 불편함"
2012년 방영한 MBC '골든타임'은 이성민에게 인생을 뒤바꾼 작품이다. 의사로서 책임을 다하는 최인혁의 진정성 있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 그간 작은 역할에서 연기에만 매진하던 이성민이라는 이름을 단숨에 스타덤에 올린 캐릭터다. 최인혁을 연기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사인요청을 해왔다. 편하게 지나다닐 수 있었던 길거리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당시를 떠올린 이성민은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골든타임' 끝나고 부담감을 많이 느꼈어요. 관심을 많이 받으니까요. 이전에는 제가 연기를 해도, 했는지 안 했는지 관심이 없었는데 막 알아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매사 행동도 조심스러워지고, 환경이 많이 바뀌었어요. 저의 위치가 달라지면서 부담이 엄청 커졌고 깜짝 놀랐죠. 사실 끊임없이 꿈꿔왔던 순간이거든요. 카메라가 터지고 사인을 해주고 많은 사람들이 절 보며 웃어주는 장면이요. 무의식 중에 꿈꿔왔던 순간이 현실이 되는데 혼란스럽고 불편하고 그렇더라고요. 수용해야 하는데, 막상 쉽진 않았어요. 이 직업을 택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극복해야하는 현실인 거 같아요."
이성민은 쉼 없이 당시의 혼란스러움을 털어놨다. 그렇게 변화를 겪은 뒤 그는 또 하나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미생'이다. 신드롬을 일으킨 이 작품에서 이성민은 오 과장으로 감동을 선사했다.
"그래도 '미생' 때는 혼란이 오지 않았어요. 많이 안정됐죠. 원톱 주인공으로 나서는 지금도 혼란스럽지 않아요. 당시 시완이나 하늘이, 소라, 요한이한테 조언을 했죠. '우리가 잘 된 게 과연 우리의 힘, 나의 힘만으로 된 것이냐. 아니다'라고요. 대중의 사랑에 맞게, 인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정진하는 이성민은 '로봇, 소리'에서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로봇과의 연기도 일품이다. 이성민의 진한 부성애가 담긴 '로봇, 소리'는 지난 28일 개봉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