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맛의 인문학)③봄동-노지에 누운 로리타 같은 풀이 '19금'의 욕망을 품다

입력 : 2016-02-25 오전 6:00:00
만전춘이 고려가요의 꽃이라면 봄동은 관능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봄동만한 관능을 본적이 없다. 꽃샘추위에 아랑곳 않고 해풍에 당당하게 잎을 흔들어대는, 저기 진도 바닷가의 봄동이야말로 ‘19금 풀’이다.그러나 세상은 섹스를 원하지 사랑을 욕망하지 않는다. 조선 사대부들이 만전춘을 음사(淫詞)라고 배척하고 급기야 대체 목적으로 ‘봉황음’이란 허황된 노래를 지은 것처럼, 세상엔 욕정의 소비만이 넘실댈 뿐 사랑의 욕망은 봄날의 눈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13일의 금요일>이란 영화가 있었다. 분명 보기는 봤는데 지금에서는 영화 제목 말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피드퀴즈에 참여한다고 치고 “음 제일 유명한 공포영화?”라고 물으면, 이 영화 제목을 들이대지 싶다. 공포영화 마니아가 아닌 나로서는 그렇게 대답하기 십상이다.
 
이 영화 때문이 아니어도 원래 ‘13일의 금요일’에는 섬뜩한 느낌의 부여라는 의미설정이 가해진다. 전통적으로 서구에서는 이날을 불길(不吉)하게 받아들였다. 대표적으로 예수가 처형당한 날이 13일의 금요일이다. 요즘에야 불길의 의미설정을 불길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13일의 금요일에 따라붙은 ‘불길’은 아마도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의미의 무의미화를 통한 담론 관행의 보편적 구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간단히, ‘13일의 금요일’은 깔깔거리며 나누는 잡담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최근에는 ‘19일의 금요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말을 줄여보아야 알 수 있다. ‘19금’이다.
 
‘19금’은 어렵다. ‘13일의 금요일’에서 당장 불길 또는 공포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반면 ‘19금’에서는, 분명하긴 하지만 모호함과 어색함이 덧씌워진다. 안 그래도 금요일엔 ‘불금’이란 별칭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특별히 ‘19일의 금요일’이 ‘19금’이 되는 것이니 도대체 그날에는 얼마나 섹시해져야 하는 것인가.
 
평소에 금요일이 ‘불금’이 아니었던 나에게 ‘19금’이라고 특별한 경험이 생기거나 특별한 경험을 시도할리 없으니, 최소한 나에게 ‘19금’은 ‘13일의 금요일’보다 더 허망하다. 19에다 수 십 년을 더했으니 ‘경계’를 둘러싼 자격논쟁과 주체적 긴장이 남의 일이다. 경계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성인에게 허용되는 섹시의 판타지를 자동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뜻일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히 아니다. 역설적으로 ‘19 너머’에서 가능한 ‘19 미만’에 대한 금지는 거의 대다수 성인에게도 금지되어 있다. 현실에서 ‘19’가 데면데면한 섹스면허에 불과하다면 ‘19금’은 영화 007시리즈 속 제임스 본드의 살인면허와 유사한 것이다. (알다시피, ‘면허’가 없다고 섹스를 못하는 건 아니다. 무면허 운전자 중에도 간혹 베스트 드라이버가 있듯이 말이다) 또한 ‘19’가 현실의 영역에 속한다면, ‘19금’은 상상의 영역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19’가 근대적이고 관료적인 욕정해소 기제라고 한다면, ‘19금’은 근대 너머의 주체화한 욕망구현 기제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때 주체는 타자화와 대면하는, 분열되고 유동하는 소비적이고 잠정적인 존재이다.
 
개인 차원에서 평면적으로 논의를 이전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19금’의 자격논쟁이 소멸하는 시점에는 현실의 역능차이가 ‘팝업’하여, 섹시의 판타지란 새로운 경계를 두고 ‘19 너머’에서 다시 성인과 미성년이 구분된다. ‘19 너머’의 ‘미성년’은 섹스는 하지만 섹시와는 무관한 존재이다. 내 나이 또래 (가부장적이어서가 아니라 내 나이 또래 여자의 몸과 마음에 관한 지식의 결여로) 남자 중에는 대뜸 “섹시는커녕 섹스라도 하면 좋겠다”고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내 대답은 이렇다. “신자유주의가 중년을 피해갈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바닥이 없는 게 진짜 바닥이다.
 
확실히 짚고 넘어갈 점은 ‘19 너머’이든 ‘19 미만’이든, 섹스를 하든 안 하든(혹은 못하든), 섹시는 섹스와 무관하고 아예 별개 영역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섹시할 수 있고 섹시함을 향유할 수 있다. ‘13일의 금요일’의 불길과 공포의 의미설정이 실제 13일의 금요일과 별 상관이 없듯이 ‘19금’은 물리적 나이와 관련되지 않는다.
 
‘19금’의 욕망이 봄동에게 말을 걸다
 
내가 몇 살이었는지, 어떤 연유로 가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이 즈음이었던 건 명확하다. 나는 외삼촌ㆍ이모들과 함께 처음으로 그들과 내 어머니의 고향을 찾았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그 뒤로 어머니의 고향을 다시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외가 식구들이 전부 도회지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진짜 외가의 방문은 내 평생에서 그때가 유일하지 싶다.
 
어머니가 시집가기 전까지 자란 그곳에는 가까운 곳에서 강이 완만하고 크게 휘어져 흘렀다. 오랜 세월 강물이 나른 모래가 쌓여 너른 백사장을 이루었고, 강 건너편에 깎아지른 절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백사장에서 제법 떨어진 지점에서 방죽이 물 흐르는 모양을 따라 휘감아 돌아갔다. 나이 미상의 나는 그 위에서 분명 어린 어머니가 미역을 감곤 하였을 강물을 멀찍이 내려다보았다.
 
땅에 뿌리를 박은 채로 생생하게 녹황색을 띠고 있는 봄동이란 식물을 그때 처음 만났다. 봄이 올 것이야 자명했지만 겨울이 떠났는지 아직 장담하기 어려운 그 시기에, 사위를 통틀어 식물의 색깔을 보여주는 물체는 봄동이 유일했다. 이모가 나에게 그 물체를 “봄동”이라고 소개했다. 그 이름은 이모의 사투리 억양까지 가세하여 어쩐지 외국말처럼 들렸다. 혹은 강 건너편 절벽에다 머리라도 찧고 돌아온 듯 돌연하였다.
 
휙 하고 한 자락 바람이 불자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내가 고개를 돌리며 눈을 찌푸리는 사이 먼지들이 “봄동”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속은 비었고 싱싱하게 작고 푸른 이파리들이 되는 대로 포개지고 구부러져 몸을 온통 벌리고 있는 모양이, 정원에 누워 있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로리타> 도입부의 로리타를 연상시켰다. 그날 저녁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봄동겉절이를 먹었다. 맛있었다.
 
노지에 누운 로리타 같은 풀
 
봄동과 배추는 다른 품종이 아니라고 한다. 어떤 배추이든 노지(露地)에서 겨울을 나며 자라고, 속이 꽉 차지 않아서 결구(結球) 형태를 취하지 못하였으며, 잎이 옆으로 퍼진 개장형(開張形) 모습을 취하면 봄동이 된다. 존재가 의식을 정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양만 다른 게 아니다. 식이섬유가 많아 장운동을 촉진하는 배추의 효능을 그대로 갖춘 것은 물론 베카로틴, 칼륨, 칼슘, 인 등이 풍부해 빈혈과 동맥경화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봄동의 매력에서 식감과 영양을 빼놓을 수 없지만, 무엇보다 그 풀이 추운 겨울 내내 언 땅에 누워서 자랐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봄동을 봄의 전령사라는 식으로 표현하지만 틀린 말이다. 봄동은 겨울과 함께 추위를 견디어 내고 봄이 오면 사라지는 겨울의 연인이다. 식물 중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렇게 결연한 방식으로 품어낸 게 또 있을까.
 
얼음 위에 댓닢 자리를 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닢 자리를 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정 준 오늘 밤 더디 새어라, 더디 새어라.
 
 
잊히지 않고 늘 염려스러운 외로운 베갯머리에 어찌 잠이 오리오.
서쪽 창문을 여니
복숭아꽃이 피어나는구나
복숭아꽃이 걱정 없이 봄바람에 웃는구나, 봄바람에 웃는구나.
 
봄동의 인동(忍冬)의 연모는 고려가요 ‘만전춘’에나 비길까. 얼음 위에다 댓잎으로 이부자리를 깔고 정인과 보내는 이 밤이 새지 말라는 절절함은 섹시의 판타지를 넘어 존재론적 심오를 형상화한다. 삶과 죽음을 관류하여 범접을 허하지 않는 사랑의 형이상학은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이 풀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오리야 오리야
어린 비오리야
여울일랑 어디 두고
소(沼)에 자러 오는가?
소 곧 얼면
여울도 좋습니다. 여울도 좋습니다.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에 베고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를 안고 누워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을 베고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를 안고 누워
약 든 가슴을 맞춥시다. 맞춥시다. 맞춥시다.
 
 
알아 주소서, 임이시여, 원대평생에 이별할 줄 모르고 지냅시다.
 
만전춘이 고려가요의 꽃이라면 봄동은 관능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봄동만한 관능을 본적이 없다. 꽃샘추위에 아랑곳 않고 해풍에 당당하게 잎을 흔들어대는, 저기 진도 바닷가의 봄동이야말로 ‘19금 풀’이다.
 
그러나 세상을 섹스를 원하지 사랑을 욕망하지 않는다. 조선 사대부들이 만전춘을 음사(淫詞)라고 배척하고 급기야 대체 목적으로 ‘봉황음’이란 허황된 노래를 지은 것처럼, 세상엔 욕정의 소비만이 넘실댈 뿐 사랑의 욕망은 봄날의 눈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요즘의 봄동이 만전춘 같은 결기를 갖추었을 리 없겠지만, ‘19금’의 상품으로 유사하게 소비되고 말겠지만, 봄바람 좋은 날 늙어가는 남자들은 봄동겉절이에다 막걸리라도 한 잔 하며 가는 겨울을 보내고 오는 봄을 맞이하면 어떨까. 술잔을 함께 기울일 사람이 옆에 없으면 큐브릭의 영화라도 보며 아마도 한동안 자신의 몸에 붙어 있었을, 그러나 지금은 잊힌 희미한 성징이라도 찾아보는 건 어떨까.(참조 두산백과)
 
봄동은 겨울과 함께 추위를 견디어 내고 봄이 오면 사라지는 겨울의 연인이다. 사진/뉴시스
 
안치용 토마토CSR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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