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컴퓨터가 정복하지 못한 바둑의 오묘한 세계에 인공지능이 도전장을 던졌다.
현역 세계 최강의 기사로 불리는 이세돌(34·한국기원) 9단이 구글의 자회사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ahGo)와 반상에 마주 앉는다. 세계 최고수와 인공지능의 맞대결은 오는 9일 오후 1시 서울 광화문 포시즌 호텔에서의 일전을 시작으로 10일, 12일, 13일, 15일 총 5번의 대국을 통해 치러진다. 백에게 덤 7.5집을 주는 중국식 룰이 적용되며 이세돌 9단과 알파고 모두 제한시간 2시간에 1분 초읽기 기회를 3회씩 갖는다. 우승상금 100만달러(한화 약 11억원)가 걸렸으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과 기계의 두뇌 싸움이라는 데 이번 대국의 의의가 있다.
최소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바둑은 '인공지능이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두뇌게임'으로 불린다. "역사상 단 한 번도 같은 수의 대국이 없었을 것"이란 바둑계의 자랑 섞인 주장이 그럴 법하게 들린다. 흑과 백이 361개의 점을 번갈아 채워나가기에 바둑 한 판에서 나오는 경우의 수는 10의 170제곱 이상으로 추산된다. 단순 계산으로 바꿔 보면 쉽게 감이 온다. 361곳의 착수 가능 지점 중 상대가 둔 1점을 빼면서 곱하는 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360에 359를 곱하고 그 값에 다시 358을 곱해나가는 식이다. 이 경우 인간이 계산하기 어려운 무한대의 수가 나온다는 게 바둑계와 과학계의 설명이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17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16강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이 백홍석 9단을 상대로 첫수를 놓고 있다. 사진/뉴시스
하지만 이를 뒤엎겠다고 나온 게 수백만개의 신경세포로 바둑을 분석하고 스스로 학습해 온 알파고다. 딥마인드에 따르면 알파고는 딥 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신기술에 힘입어 100만번의 대국을 4주 만에 학습할 수 있다. 이세돌 9단의 경력과 비교하면 이러한 학습 속도의 위력을 더욱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12세에 입단해 20년 경력을 자랑하는 이세돌 9단이 1년에 1000번의 대국을 뒀다고 보면 2만번의 대국을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단순 학습량에서 알파고가 앞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알파고는 지난해 10월 중국 프로 기사이자 유럽 바둑 챔피언인 판후이(중국) 2단을 5전 전승으로 꺾었다. 인공지능이 사람과 호선으로 둬 이긴 첫 번째 대국으로 기록됐다. 이후 4개월 남짓의 시간이 지났으니 알파고가 최소 400만번의 대국 경험을 더 했다고 볼 수 있다. 딥마인드 측은 "알파고가 최고의 다른 바둑 프로그램과 500차례 펼친 대국에서 499승1패를 거뒀다"고 최근 과학저널 '네이처'에 밝힌 바 있다. 승률 99.8%에 달하는 수치다.
그렇지만 바둑계는 이세돌 9단을 믿고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 2점 밀린다는 데 의견이 모인다. 중국 바둑랭킹 1위인 커제 9단은 "정상급 기사가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세돌이 알파고에 이길 것을 확신한다"고 예측했다. 일본의 이야마 유타 9단도 "판후이 기사와 알파고의 기보를 보면 알파고가 지금 실력으로는 이세돌 9단을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현지 언론에 답했다. 이밖에 여전히 사람이 돌을 잡는 '낭만'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바둑계에 존재한다.
반면 학계의 시선은 인공지능의 '바둑 정복'이 시간문제라는 데 쏠린다. 이번 대국의 승패를 떠나 알파고의 뛰어난 학습 능력이 훗날 빛을 발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의 교수는 "이번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체스를 이겼던 인공지능이 좀 더 복잡한 바둑으로 인간에게 도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며 "확률과 패턴을 계산하던 인공지능이 이제 인간처럼 경험으로 학습하고 추론을 통해 인간에게 도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는 "알파고가 이세돌 기사와 대결을 하면서 더 강해질 텐데 만약 나중에 재대결이 벌어지면 그때는 승부 예측이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해 10월 중국 바둑 기사 판후이(왼쪽)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지시대로 대국에 임하고 있는 딥마인드 관계자의 모습. 사진/구글 딥마인드
이미 인공지능에 자리를 넘겨준 체스는 이런 진단의 근거 역할을 하고 있다. 서양의 체스는 이미 한참 전인 1997년 5월 세계챔피언이던 카스파로프(러시아)가 IBM사의 슈퍼컴퓨터 '딥블루'에 패했다. 딥블루가 체스 챔피언과의 첫 대결에서 패한 뒤 2년 만에 재대결에서 따낸 승리였다. 그 다음부터 내로라하는 체스 고수들이 인공지능에 도전했으나 이미 한 번 기울어진 승부의 추를 되돌리진 못했다.
이번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맞대결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에 계속 도전할 수 있으나 인간의 경우 인공지능에 한 번 밀리면 다시 뒤집을 수 없다는 예측도 있다. 이세돌 9단은 "5-0으로 이길 자신이 있다. 내가 한 번이라도 진다면 알파고의 승리라고 본다"면서 "인간의 장점은 창의성이다.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것과 낭만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실제 이세돌 9단은 정석을 흔드는 창의적인 수와 전체 대국 흐름을 거스르는 심리전에 능한 기사로 분류된다. 다만 이러한 이세돌 9단의 특성이 감정 변화가 전혀 없는 인공지능을 상대할 때도 가치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대국을 지켜보기 위해 지난 7일 입국한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는 "승률을 50대 50으로 보고 있다. 이세돌 9단의 창의력이 흥미롭지만 우리도 자신 있다"고 응수했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