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세이)영화 '4등'의 질문…"1등만 하면 상관없나요?"

입력 : 2016-03-16 오후 3:28:47
[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내일부터 레슬링부 OO이도 수업에 들어온다."
 
고교 시절 어느 날 날아든 통보였다. 교실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으레 건너 뛰던 출석 번호의 부활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사춘기 청소년들에겐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강자의 출현이었다. '레슬링부'라는 단어는 급우 모두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그런데 예상외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레슬링 친구'는 생각보다 순수했다. 찌그러진 귀가 그의 고된 훈련을 드러냈으나 그 또한 자꾸 보니 금방 익숙해졌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구와 시비를 붙거나 '빵 셔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레슬링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뒤에서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몇몇 아이들이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갔으나 나중엔 거의 모두가 그가 전수해주는 호신술을 배웠다. 수학 우등생은 중학교 수학책을 들고 온 그의 옆에 붙어 방정식을 함께 풀었다.
 
어제 명동역 CGV에서 열린 영화 '4등'을 보고 나오며 제일 먼저 그 '레슬링 친구'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언급된 '폭력적인 체육 시스템'의 대표적 희생 사례가 그 친구였다. 그 친구가 레슬링부에 있을 당시 매번 1등을 휩쓸던 선수는 이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당시 '레슬링 친구'의 실력은 그 1등과 대등하거나 아주 조금 모자란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친구는 혹독한 훈련과 선배들에게 맞는 것에 지쳐 레슬링부를 떠났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야! 4등! 나 너 때문에 죽겠다. 진짜."
"자기야, 난 솔직히 준호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
 
영화 '4등'에서 초등학생 수영 선수 준호(유재상 분)의 엄마 정애(이항나 분)가 하는 말이다. 예전에 중학생 농구대회를 취재하러 갔을 때 봤던 모습과 겹쳤다. 농구 코치가 대놓고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데 부모들은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들과 준호 엄마 모두 엘리트 스포츠의 폐해를 묵인한 채 아이들의 운동하는 즐거움을 갉아먹는 데 일조한 가해자였다. "좋은 대학 가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그들의 절대논리와 그 절대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시스템이 아이들을 짓눌렀다. 이제 막 피어오른 신체적인 즐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아이들은 주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기계적 행동에만 매달리게 됐다.
 
"엄만 정말 내가 맞아서라도 1등만 하면 좋겠어?"
 
수영 코치 광수(박해준 분)의 폭력에 시달리던 준호는 끝내 이렇게 응수한다. 영화 내내 억척스럽던 엄마는 폭력과 1등의 불가분 관계가 문득 서러워 대답 없이 운다.
 
이날 함께 영화를 본 몇몇 스포츠 관계자들은 "맞아요. 진짜 저런 엄마들 많아요", "내가 다 무섭네요" 등의 말을 속삭였다. 조용해야 할 영화관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 듯했다. 상영관엔 다수의 스포츠 관계자들이 초대돼 있었다. 스포츠계의 오랜 문제가 스크린에 비치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대다수 스포츠인은 엘리트 시스템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 일반적인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운동 선수를 꿈꿀 때 "대학 갈 때까지는 포기 없이 해야 해"라고 부모들이 선을 긋는 이유가 있다.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거나 한 번 발을 디디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두운 세계에 내보내는 것처럼 행동한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 아이들은 점점 입을 다문 채 운동하는 기계가 된다. "내가 집중을 못 했기 때문"이라는 준호의 대사처럼 불합리한 훈련과 폭력은 아이들의 탓으로 돌려진다.
 
"나이트클럽 지나가면 저흰 딱 알아요. 키 크면 농구, 날렵해 보이면 축구, 다부져 보이면 야구부죠."
 
모 선수 출신 인사는 예전에 이런 말을 했다. 운동을 하다 실패하면 나이트클럽에 취직하는 경우가 꽤 많다는 의미다. 일정 부분 과장이 있겠지만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얘기다. 혹독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채 뒤늦게 뛰쳐나온 아이들은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운동하다 그만두고 시험을 치러 대학에 입학하면 뉴스가 된다. 역으로 보면 운동하다 실패할 경우 대학 가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이야기다. 체육계의 초 엘리트가 되지 못할 경우 운동을 했던 경험은 어디서도 열매 맺지 못하고 그냥 버려지는 세상이다.
 
수많은 학생 운동 선수 중 한 자릿수 내외의 확률을 통과한 이들만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프로선수가 된다. 입시 비리가 불거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 제목이 4등인 것도 대부분 3등까지만 상급 학교 진학에 혜택이 돌아가서다. "내가 1등만 하면 상관없어?"라는 영화 속 준호의 말과 "남들보다 빨리 들어가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라는 정지우 감독의 문제 제기가 따끔하게 다가온다. 생활체육과의 통합을 내건 통합체육회를 포함해 스포츠계가 꼭 답해야 할 질문이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
 
◇4월 개봉을 앞둔 영화 4등. 사진/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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