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궁색한 자의 무기로 둔갑한 당의 '정체성'

입력 : 2016-03-29 오전 6:00:00
해프닝의 연속이었던 20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번 공천은 진흙탕 싸움이었고 한편의 막장 드라마였다. 한국 정치가 이 정도로 형편없는 줄 몰랐다는 탄식의 소리가 장안을 맴돌았다.
 
특히 새누리당의 공천은 원칙도, 기준도 없었다. 공천 막바지에 원칙으로 부각된 ‘당의 정체성’ 시비는 좀 섬찟했다. 정체성은 보통 내셔널리스트들이 강조하는 개념으로,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체성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유승민 의원을 축출하기 위한 궁색한 무기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새누리당은 당헌·당규에 당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프랑스 위키피디아 사전은 정치적 정체성을 “공동으로 어떤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특정 집단에 귀속하는 것으로 이는 ‘내셔날리즘’, ‘이민족 간의 관계’, ‘이데올로기적 축’과 같은 특별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태도 표명”으로 정의내린다.
 
이 개념으로 보면, 유 의원이 박근혜 정부의 복지정책을 비난한 것은 ‘내셔날리즘’, ‘이민족 간의 관계’와 같은 특정 사안으로 결코 볼 수 없다. 단지 정부의 복지정책이 이대로는 불가능하다는 진실의 토로에 불과하다. 이 진실을 청와대와 친박이 진지하게 수용하기보다 왜곡시켰고, 급기야 배신의 정치라는 죄목으로 유 의원을 끌어내리는 문제로 확대했다.
 
허나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모두가 입 다물고 있는 이 불편한 진실을 말한 죄 밖에 없는 유 의원을 당의 정체성에 위배된다고 궁지로 몰고 공천 심사를 질질 끈 친박의 행태는 과연 무엇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유 의원은 보수정당의 옷을 입고 3선을 했고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를 위해 뛰었다. 그리고 한 때는 새누리당의 원내대표까지 지냈다. 이러한 사람을 실체도 없고 개념도 없는 정체성 시비를 걸어 기어이 빨간 옷을 벗겨버리는 친박의 정체성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프랑스에서는 당의 정체성을 운운하며 왈가왈부하는 일은 거의 없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정체성이라는 말보다 당의 가치(Valeurs)라는 용어를 쓴다. 예를 들면 한 사회당 정치인이 사회당의 가치와 위배되는 행동이나 발언을 했다면 이는 큰 논쟁거리가 된다. 그러나 유 의원처럼 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들거나 쓴소리를 했다고 해서 당의 가치를 위배했다며 축출하겠다고 소동을 벌이지는 않는다.
 
요즘 프랑스의 핫이슈는 노동법 개정이다. 노동부 장관 엘 코므리가 만든 새 노동법은 좌파의 가치에서 꽤 벗어나 우클릭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파는 환영이지만 좌파의 일부 의원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이를 지켜보던 사회당 전 총수이자 릴르의 현 시장인 마르틴 오브리는 르몽드지 논단에서 올랑드-발스 정부가 정도를 벗어났고, 프랑스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호통을 쳤다. 전 교육부 장관이자 현 의원인 브느와 아몽도 이 법의 주범인 올랑드 정부를 맹비난했다.
 
이렇게 쓴소리를 퍼부어댄 오브리와 아몽에게 올랑드 정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한국처럼 배신의 정치라고 노여워하고 이들을 제거하려 꼼수를 부렸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올랑드 정부는 새 노동법을 전면 재검토해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고, 발스 수상은 즉각 노동조합 관계자들을 만나 의견 수렴에 부산을 떨었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다. 이견을 제시하고 그 이견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수정하는 과정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통치자가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면 이는 “짐은 곧 국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루이 14세가 건재했던 16세기 절대 권력의 시대가 아니다. 통치자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과 대등한 21세기 평등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희망이 없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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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