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회 인하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법원이 다시 정의와 인권을 외면하는 판결을 했다. 대법원은 지난 4월 7일 민청학련 피해자 29명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배상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이유다.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정의와 인권에는 시효가 없다는 원칙을 위반한 심각한 판결이다.
1974년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갈림길이었다. 1974년 47명이 연루된 초대형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역시 초대형 사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재심으로 무죄를 받아, 조작된 것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간첩단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해야 할 정도로 유신정권은 위기였다. 민청학련을 처벌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가 발령되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이나 그 관련단체의 구성원, 동조자, 회합한 자, 편의제공자는 최고 사형에 처한다는 것, 민청학련 관련 문서 등을 제작 또는 소지한 자, 민청학련 구성원으로서 자수를 하지 아니한 자 등을 모두 형벌에 처한다는 것 등이다. 긴급조치 1호와 같이 영장 없이 체포했고 민간법정이 아닌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했다.
긴급조치 4호로 중앙정보부가 연행 조사한 사람은 1,204명이었다. 이 중 235명이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되었고 180명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번에 국가손해배상을 청구한 피해자들은 기소유예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긴급조치 4호는 오로지 민청학련을 처벌하기 위하여 급조된 것으로서 발령 당시부터 위헌, 무효였다. 법률적으로는 35년이나 지나 2013년 대법원이 공식적으로 위헌, 무효라고 확인한다. 이에 따라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은 피해자들은 모두 재심을 거쳐 무죄판결을 받았다. 1995년 당시 법관들이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법부 관련 사건이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사건 등 유신 당시 판결’이다.
1974년 당시 대법원은 비상군법회의를 거쳐 올라온 민청학련 사건을 최종적으로 심판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무고한 학생, 시민의 생명과 인권이 위험한 그 순간 단 한 명도 구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신정권의 조작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시민이 대법원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대법원은 시민이 아닌 정권의 손을 잡았다. 씻을 수 없는 잘못이다.
다시 이번 판결을 살펴보자. 이번 사건의 쟁점은 소멸시효였다. 원래 손해배상은 손해발생을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가 있었던 날로부터 5년 이내에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손해배상을 하는데 장애가 있으면 소멸시효는 진행하지 않는다.
고등법원은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이 긴급조치 4호를 위헌, 무효라고 한 시점이 재판을 할 장애가 없어진 때이고 이때부터 계산해 보니 소멸시효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고들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된 1974년에 이미 청구권 행사 장애가 사라졌다고 보았다. 그래서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보고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부정했다.
대법원의 논리는 모순이다. 긴급조치의 위헌, 무효는 국가배상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긴급조치의 위헌, 무효는 최종적으로 대법원이 확인한다. 대법원의 긴급조치 위헌, 무효판결에 의하면 긴급조치 위헌심사 권한은 대법원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법원이 긴급조치가 위헌, 무효라고 확인해야 청구권이 발생하는 것이다. 간단한 삼단논법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자신이 선언한 법원칙을 어기고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거절했다.
논리모순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대법원이 정의와 인권에 둔감한 것이 더 큰 문제다. 원래 국가폭력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는 것에는 시효가 없다. 국가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과거사 정리는 단순한 법적 청산이 아니다. 진상 규명, 사죄와 반성, 배상과 보상, 기억과 기념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본의 전쟁책임, 식민책임에 대하여 계속 사과와 반성,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만 우리는 과거의 잔인한 국가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국가폭력을 대신하여 정의를 세우고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간단한 삼단논법을 어겼다. 정의와 인권에는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도 망각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반성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과거행 열차가 어디까지 계속될지 매우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