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⑭"그대가 믿는 바를 진실로 전하라"

70년대 사람들(3) 한국 민중과 함께 한 벽안의 선교사들

입력 : 2016-04-11 오전 6:00:00
4·16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지난 9일 진도 팽목항에서 약 4.16km 떨어진 무궁화동산에 세월호 '기억의 숲'이 조성됐다. 온라인 시민모금을 통해 완공된 이 사업의 최초 제안자는 인도주의 활동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의 아들이고 이번 완공식에도 그 손자·손녀가 세월호 유가족, 시민들과 함께 했다 한다. 수십 년 전 바다를 건너와 이 땅의 사람들과 슬픔을 함께 나눈 벽안의 선교사들은 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고 진정으로 민중과 함께 한 이들이었다. 
 
인혁당 희생자를 가슴에 품고 - 시노트 신부
  
'인민혁명당 사건' 혹은 '인혁당 사건'은 1964년의 1차 사건과 1974년의 2차 사건으로 나뉜다. 1차는 19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변란을 기도한 지하조직이라고 발표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관련자 일부가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보통 '인혁당 사건'이라 할 때는 2차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가리킨다.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반(反)유신투쟁이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즉 '민청학련 사건'을 일으킨다. '인혁당 재건위'가 또다시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을 조종한 배후조직으로 지목되는데, 국가전복 기도와 공산정권 추진 혐의로 민청학련 관련자 180여 명이 구속·기소되고 인혁당 관련자들 중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의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진 다음날 새벽에 형이 집행된다. 이 초스피드의 사형집행은 '사법살인'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았으며, 1975년 4월9일은 국제법학자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에 의해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리게 된다. 
  
지난 2007년 1월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 선거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제임스 시노트 신부의 모습. 사진/뉴시스
 
<만인보>에는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다가 추방된 두 명의 성직자가 등장한다.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61년 한국에 와 인천교구에서 일하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1929-2014, 한국명 진필세)가 그 한 명이다. "서해 섬사람들의 무뚝뚝한 친구이다가 / 서울의 민주화 / 한국의 민주화의 친구이다가 / 박정희한테 쫓겨났다 / 배를 타면 배가 기우뚱할 만큼 무뚝뚝했다 // 커다란 대머리에 / 살구 열려 / 살구 하나하나가 / 인혁당 도예종의 넋이런가 / 이수병 여정남의 넋이런가 // 껑충한 키 굵은 두 다리에 / 호박 열려 / 호박 한 덩이 팔아 / 동아일보 백지광고 채우다가 / 박정희한테 쫓겨났다"('씨노트 신부', 11권).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됐음을 폭로하고 사형수들의 구명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해외에 사건의 진상을 알리던 시노트 신부는 1975년 4월30일 '비자기간 만료'를 이유로 추방당하게 된다. 사형집행 다음날인 4월10일, 위령미사를 올리기 위해 응암동 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영구차를 경찰이 크레인으로 탈취해 이를 막던 문정현 신부가 다리를 다쳤을 때도 시노트 신부가 함께 하고 있었다. 앞의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는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사건 때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거기에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내내 한국이었"고 "기도도 / 미사도 한국이었"다고 노래한 고은 시인의 말처럼(앞의 시), 시노트 신부는 미국에서도 인혁당 사건을 가슴에 품고 한국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 2003년부터 다시 한국에 살게 된 그는 이듬해 <1975년 4월 9일>이란 책을 펴내 인혁당 사건을 증언하고, 2014년 12월23일 안구기증과 함께 선종한다.
 
진실을 외치다 추방되다 - 오글 목사
  
감리교회의 조지 오글 목사(1929~, 한국명 오명걸)는 1974년 12월14일 한국 정부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당한다. 이 글의 연재 ⑦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그는 1954년에 선교사로 파견되어와 1957년까지 한국에 머문 후 귀국한다. 1960년 한국에 다시 온 그는 이듬해인 61년부터 인천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게 된다. "1957년 4월 산업전도가 출발했다 / 생산재 생산공장 / 전쟁 이후 하나둘 생겨날 때 / 거기에 산업선교의 의식이 출발했다 // 전국 12개 도시 / 조지송 목사가 영등포 시영아파트 단칸방 / 노동자를 모았다 // 본디 프랑스 노동사제를 본떠 / 직접 일하는 목사들 / 공장에 / 부두에 스며들었다 // 이런 일이 차츰 인권운동으로 되어 / 인혁당사건 / 사형선고의 피고를 옹호하다가 / 추방된 목사가 / 오명걸 조지 오글 아니던가 // 와서 일하고 / 가서 석사 공부하고 / 와서 일하고 / 가서 박사 공부하고 // 그러다가 와서 / 죽어간 사람들의 편에 섰다가 / 추방되었다"('오글', 15권).
 
고은시인 육필원고 '오글' 초안. ⓒ고은재단
 
오글 목사는 1974년 10월10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열린 구속자를 위한 '목요기도회'에서 인혁당 관련자를 옹호하고 고문조작설을 제기해 조사를 받는데, 이후에도 계속 구속자 석방을 주장하자 정권은 출입국관리법 제31조 3항과 22조 2항을 위반한 혐의로 12월14일 강제출국명령을 내려 추방해버린다. 그가 떠날 때 인혁당 관련자들의 부인들이 어려울 때 팔아 쓰라고 금반지를 선물로 줬는데, 오글 목사는 28년 동안 그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다가 2002년 인권상 수상을 위해 한국에 왔을 때도 끼고 왔으니 그의 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임을 발표했고, 2005년에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 역시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마침내 2007년 서울 중앙지법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니, 이로써 '사법살인' 희생자들의 넋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인가.
 
가톨릭여학생관의 수녀님, 난지도의 신부님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 사회교육기관인 가톨릭여학생관(현 전진상교육관)이 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한 역할은 지대하다. 그곳은 빨갱이로 외면당한 인혁당 사건 가족들을 받아준 유일한 곳이었고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쉴 수 있는 장소였다. 그리하여 구속자가족협의회(민가협의 전신)가 만들어지고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가 잉태되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수배자들이 거쳐 가는 곳, 유신치하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편지와 인쇄물들이 해외로 송출되는 교두보이며 '월요강좌'를 통해 의식의 각성과 시국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이루는 곳,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소통의 장(場)이었다. 그 가운데에 꼴레뜨 수녀가 서 있다. 
  
전진상교육관(구 가톨릭여학생관) 1985년 3월 프로그램(겉). 자료/고은재단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난 / 꼴레뜨 자매 / 세속 수녀 되어 / … / 언니는 서울 몇십년 / 척 한국말 / 척 한국음식 창자에까지 익어 / 치즈 없이 / 여기가 내 나라이다 // 얼마나 거룩한가 놀라운가 / 이 치열한 일치에의 도달이야말로 // 한국 이름 노정혜 / 민청학련사건 이래 / 아니 그 이전부터 / 한국 인권운동에 숨은 공 / 성명서 몰래 빼돌리고 / 성금 모으고 / 숨겨주고 / 나도 숨겨주기로 약속했다 / 마음이야 벌판 / 이제는 신림동 빈민굴에 둥지 틀고 / 그 가난 속에서 / 라면 한 그릇도 잔치로 여기며 산다 // 이런 언니 하나로 종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꼴레뜨 노정혜', 12권).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또 한 명의 사제, 한국이름 임경명 신부는 군더더기를 덧붙이지 않아도 다음 시로 족하리라. "프랑스 브르따뉴 지방 출신 // 신부 엠마누엘 께르모알 / … / 빠리 외방전도회 소속으로 / 사제 서품 바로 뒤 / 1974년 한국에 파송되었다 // 가라 / 가서 전하라 / 그대가 믿는 바를 진실로 전하라 // 그는 군포 불광동 / 금호동 미아리 성당 미사 집전하다가 / 그만두고 / 난데없음이여 / 난지도 쓰레기 세상에 스스로 파송되었다 / 어느새 한국말 술술 나와 / 하루에 말 몇마디 / 어이 박씨 좀 쉬었다 할까 / 일주일 쓰레기 막노동 3일 채우고 나서 / 박씨 소주 한잔 걸칠까 / 낮은 데로 임하소서 따위 / 그런 수작도 다 팽개쳐 / 어이 박씨 하루가 훌렁 모자 벗었네그려 / 장차 난지도 플라스틱 재활용 일꾼이 되기까지 / 그 악취 / 그 오물더미 속 / 전라도 출신 박씨와 / 임경명이야 / 온전히 뱃속까지 훤히 아는 사이 한통속 // 해가 팍 저물어 꺼뭇꺼뭇한 초저녁"('임경명', 15권).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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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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