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⑫"이만하면 이 세상 되었다"

물 속의 달

입력 : 2016-03-28 오전 6:00:00
도시의 바쁜 일상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별과 달을 쳐다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쯤 저녁식사 후 TV를 보며 휴식하는 당신에게 평소보다 밝은 빛이 창밖으로부터 쏟아지는 느낌이 든다면 아마도 거기에는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을 것이다. 그 하늘의 달은 하나인데 물이 있는 곳에는 다 달(그림자)이 있으니 불가에서 일컫기를, 본래 하늘에 있는 달은 법신불(法身佛)이고 물에 비쳐진 달은 화신불(化身佛)이라. 법신불이 진리의 본체라면 화신불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부처님이 몸을 나투신 것이니 여기 두만강 '물 속의 달(水月)'이 있다.
 
경허의 파계와 고행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선사(鏡虛, 1849-1912)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맥이 끊긴 선(禪)을 다시 일으킨 대선사로 칭송받는 동시에, 술과 여자, 고기를 가리지 않는 '막행막식'의 기행으로 인해 승려들의 파계관행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쇠락해가는 조선에 태어나 9세 때 청계사로 출가하여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서 수학한 뒤 강백(강사)으로 활동한다. 1879년 어느 날 환속한 스승 계허를 만나러 가던 중 천안 근방에서 콜레라로 마을사람들이 모두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채 동학사로 돌아온 그는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 이후 서산의 연암산 천장암으로 옮겨 고행에 찬 보림(깨우침을 연마함)을 해나가는데, 이때 '경허의 세 달'이라고 불리는 수월, 혜월, 만공이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된다. 
  
불교에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경허선사는 말년에 환속해 조선시대 유배지로 유명한 함경도 오지 삼수갑산에서 박난주라는 이름의 서당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친다. "삼수갑산 어디메이뇨 / 거기까지 흘러가 / 깎았던 머리 길렀으며 / 어느 불쌍한 / 새끼 달린 아낙 불러들여 영감이 되고 / 두메산골 아이들 훈장이 되어 / 들쭉술에 취해 살다가 간 사람 // 조선말 경허 대선사 / 그의 성은 송씨였다 // … / 송씨를 박씨로 갈아버렸다 / 경허라는 큰 이름도 / 훈장 난주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렸다 // 이 난주야말로 경허가 넘어간 곳이라!"('박난주', 10권).
  
경허의 주색행위 같은 계율파괴를 원효대사의 무애행(無碍行)과 같은 궤도에 두고 '무애행'이라 칭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커 보이나, 그가 선풍을 진작했다는 것과 구한말 불행한 시대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 옆에 있고자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경허 / 끊어진 핏줄 이어냈도다 / 선정(禪定)의 핏줄 이어 / 선정의 꽃 화들짝 놀라 / 이 산 / 저 산에 피어났도다 // 이제 나 없애버리자꾸나 / 이제 경허 / 내버리자꾸나 / 버린 삼태기가 되자꾸나 / 다 닳아빠진 / 숫돌이 되자꾸나 // 청일전쟁 뒤 / 평양 8만이 1만 5천이 되어버렸도다 / 다 죽었다 / 다 죽고 / 여기저기 귀신 형용 살아남았도다 / … // 이런 평양 지나며 / 경허가 경허를 버렸도다 / … // 압록강 기슭 / 강계에 이르렀도다 / 강계군 종남면 한전동 김탁의 집 행랑방에 머물렀도다 / 그 김탁 / 상해로 망명길 떠나고 / 경허야 갑산으로 떠났도다 // … // 어디에도 경허 자취 온데간데없도다"('경허 마누라', 24권). 
 
'경허의 세 달(三月)'-수월
 
천장암에서 만난 '경허의 세 달' 수월(水月, 1855-1928), 혜월(慧月, 1861-1937), 만공(滿空, 1871-1946)은 각각 북쪽, 남쪽 그리고 중앙으로 길을 떠나기로 약속한다. 그리하여 수월은 북녘(북간도)에 뜬 상현달이 되고, 혜월은 남녘(영남)에 뜬 하현달, 만공은 그 가운데(호서)에 뜬 보름달이 된다. 필자에게 특히 감동으로 다가온 '물 속의 달' 수월스님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를 하다가 29세에 천장암으로 출가하였는데, 머슴이었기에 글을 알지 못하였으나 '천수대비주' 독송으로 정진해 깨달음을 얻고, 항상 말없이 쉬지 않고 일하는 수행자였다. 그의 행적은 이러하다.
  
왼쪽부터 수월, 혜월, 만공
 
"두만강을 건넜다 / 잿빛 먹물빛 옷 벗었다 / 머리 길러 / 상투를 음전히 올렸다 // 두만강 건너 / 회막동 // 거기서 소를 길렀다 / 열일곱 마리 / 열여덟 마리 길렀다 / 북관의 소들 / 간도땅 논갈이를 썩 잘했다 // … // 밤에는 짚신을 삼았다 // 스무 켤레 / 서른 켤레 / 마당 나뭇가지에 / 주렁주렁 걸어두었다 / 덕지덕지 걸어두었다 // 강 건너온 조선동포들 / 신 없는 동포들 / 제 발에 맞는 것 신고 갔다 // 가마솥 안쳐 / 몇십명씩 / 주먹밥 먹여 보냈다 / 쉰여덟살 / 예순살 / 그런 나날을 웃으며 보냈다 // 그런 뒤 아라사 접경 / 흑룡강성 수분하로 갔다 / 개들이 꼬리 쳤다 / 꿩과 노루 도마뱀도 왔다 / 수분하 육년살이 / 거기서도 내내 미투리 삼았다 / 새끼 꼬았다 // 1928년 일흔네살 / 이만하면 / 이 세상 되었다 / 개울에 가 몸 씻었다 / 앉아 / 숨 놓았다 // 해가 벌써 짧아졌다"('북관 수월', 25권).
  
그는 모기도 빈대도 죽이지 않았고, 늘 누더기를 걸치고 일을 했으며,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는데, 그의 곁에는 호랑이가 따라다녔다고 한다. 수월스님은 1920년 무렵 동포들이 지어준 화엄사(華嚴寺)에서 1928년 열반 때까지 주석하게 되는데, 이때 효봉선사를 비롯해 여러 스님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 "금강산을 떠났다 / … / 갈대 욱은 강 쉬이 건너선 나루 / 국경수비대가 바랑을 후닥닥 뒤져보았다 // 두만강 건너 // 간도땅 나자구(羅子溝) / 송림산 / 허술한 단칸 화엄사 / 거기 수월 계셨다 / 나무 한짐 지고 내려오는 / 수월 계셨다 // 거기 찾아간 원명 수좌 / 지게 진 / 수월께 큰절을 드렸다 // 어디서 왔는고 / 금강산 석두스님 아래 있다 왔습니다 / 어서 가세 / 배고플 테니 밥 먹으러 가세 // 사흘 동안 / 원명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 수월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흐음 그랬을 터이지 그랬을 터이지 // 떠나는 날 / 짚신 두 켤레 받았다 원명은 나중의 효봉이라 // 남녘에는 하마 꽃소식 있겠지"('수월을 찾아서', 24권).
 
혜월과 만공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한 평생 이름 없이 정진하며 일제치하로부터 탈출해 온 동포들을 돌보고 모든 생명체를 귀히 여긴 상현달 수월. 하현달 혜월 역시 그 못지않게 노동 속에 정진했던, 일명 '천진불' 스님이다. "통도사 극락암 / 소나무숲 누구의 넋이 드러나고 누구의 몸이 사라진다 / … // 극락암 조실 혜월 / 누구시더라 // 경허의 제자 / 만공 / 한암 / 수월 / 혜월 / 이 가운데 혜월이시라 // 이 선덕(禪德)께서야 숫제 농투성이시라 / 소 두 마리를 기르느라 / 소꼴 베고 / 외양간 쳐내고 / 이 선덕께서야 숫제 아랫것이시라 / 누구한테 반말한 적 없으시고 / 어느 아이한테 / 심부름 시켜본 적 없으셨다 // 떨어진 솔방울 모아다가 / 솔방울 때어 / 늘 방안이 뜨뜻미지근 // 방에 들어가면 / 좌선 대신 / 독경 대신 / 짚신 삼아 / 학인들에게 / 수좌들에게 두루 신발 보시 // 세상 떠날 때도 / 요란한 임종게 없이 / 상좌들 잠든 뒤 / 큰절 주지와 강원 조실 물러간 뒤 /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 언제 갔는지 모르게 딸꾹 가셨다 // 새벽 예불 뒤에야 / 혜월 열반이 별수없이 알려졌다"('혜월', 25권).
 
고은시인 육필원고 '혜월' 초안. ⓒ고은재단
  
만공월면(滿空月面)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에게 독립자금을 건네주고 김좌진 장군과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지는데, 안면도 간월암에서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위한 그러나 실제로는 조국 독립을 위한 1000일 기도를 진행한 후 3일 뒤에 해방이 찾아왔으니 그 기쁨이 오죽 크랴. 그는 1921년 11월30일 '조선불교 선학원' 설립에도 참여했는데, 선학원은 일제의 '사찰령'에 예속되지 않기 위해 사찰령의 구속을 받는 명칭인 '사(寺)'나 '암(庵)'을 쓰지 않고 '원(院)'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대항하고 한국의 전통불교를 고수하기 위해 1941년 선학원 고승대회를 주도하였다. 31본산 주지 가운데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거부하기도 했던 만공스님은 경허선사의 법을 이은 덕숭총림의 실질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인보>의 한 시는 진리를 찾고 있는 23세의 풋풋한 만공도 그리고 있어 고승들의 발전과정이 흥미롭다. "젊으나 젊은 만공 / 동짓달 초하루 / 충청도 조치원 들녘의 한 움막 / 오다가다 만난 / 어린아이와 함께 묵었다 // 아이의 눈빛에 서리가 돋았다 / 돌연 이 아이의 입이 열렸다 // 모든 이치가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 그 하나는 / 대관절 어디로 간다 합니까 // 이 아이의 물음에 꽉 막힌 만공의 깜깜절벽 // 두 사람 모두 저녁을 굶었다"('1893년 만공 23세', 25권).
 
고은시인 육필원고 '1893년 만공 23세' 초안. ⓒ고은재단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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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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