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장원급제 DNA와 장인 DNA

입력 : 2016-04-18 오전 10:59:48
‘철(鐵)의 여인’으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이공계 출신이었다.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거기까지가 전부다. 전공을 바꿔 28세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대처 총리가 이공계나 과학 분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대처 총리 시절 영국의 과학기술이 퇴보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대처 총리가 이공계 출신이라 영국의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 없다. 대처는 그냥 화학과를 졸업한 총리였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대표적인 엔지니어 출신은 허버트 후버였다.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지질학과 광산학을 공부했다. 공부만 한 게 아니라 광산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기도 했다. 이공계 출신인 후버에게 과학기술계는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대공황이었다. 과학자들도 기대를 접었다. 오히려 과학자들이 연방정부의 과학 재정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후임 루스벨트 시절이었다. 후버는 엔지니어 출신 대통령일 뿐이었다.
 
과학기술계 출신 지도자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라는 중국이다. 후진타오(胡錦濤)는 칭화(淸華)대에서 기계공학을, 후임자인 시진핑(習近平)은 같은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중국 최고지도자 9명 중 8명이 과학자나 공학자 출신이다. 그렇더라도 중국의 최고 지도부가 과학기술계 출신이기 때문에 중국이 과학기술을 집중적으로 육성한다는 논리는 평면적이다. 수뇌부가 이공계 출신이 아니었다면 중국이 과학기술 정책을 포기했을까? 중국의 지도층에 과학기술계 출신이 다수 포진한 것은 개혁·개방 정책이 가져온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5월 말이면 20대 국회가 개원한다. 선거와 당선자 분석은 차고 넘치니 생략하기로 하자.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공계 출신의 국회 입성이다. 이번 선거에서 각 당의 비례대표 1번은 과학자, 혹은 정보기술(IT) 전문가였다. 더불어민주당의 비례 1번은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수학을 전공한 박경미 홍익대 교수다. 새누리당은 사물인터넷(IoT) 전문가 출신인 송희경 전 KT 전무가 비례 1번이다, 국민의당은 신용현 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과 오세정 전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을 비례 1, 2번에 배치했다. 이들 외에도 일부 이공계 출신, IT 전문가들이 각 당의 비례, 혹은 지역구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어디서는 이공계 출신의 국회 입성에 기대감을 나타내고, 또 어디서는 이공계 출신이 너무 적다고 우려감을 표시한다. 어떤 매체는 당장에라도 세상이 뒤바뀔 것처럼 부산을 떨기도 했다(지난 대선에서 이공계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호들갑 떨었을 때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과학기술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 법과 예산을 다루는 입법부에 들어갔으니 과학기술이 잘 될 것이라는 게 판단의 근거다. 
 
결론적으로 말해 순진한 생각이다.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다. 과학기술계 출신이 국회에 많이 입성한다고 과학기술계가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논리가 맞는다면, 우리나라 법조계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국회의원 가운데 법조인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을 보라. 산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대통령이 됐지만 국가 부채만 늘었고, 이공계 출신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과학기술계가 특별히 나아졌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현장의 체감은 오히려 거꾸로다. 
 
중요한 것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다. '과학기술계 출신' 아무개 의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개' 의원 개인의 자질과 DNA가 중요할 뿐이다. 괴짜 물리학자(김대식)와 삐딱한 법학자(김두식) 형제는 <공부논쟁>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장원급제한 선비가 영의정을 꿈꾸는 것처럼 그런 과학자들이 인생의 후반부에 장관, 총리를 꿈꾸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어요. 주변에서도 그런 기대를 할 거고요. 과학 분야까지도 장인 DNA가 아니라 장원급제 DNA를 가진 사람들이 장악하게 된 거죠."
 
국회에 입성한 과학기술계·IT 인사들의 DNA가 장원급제인지, 장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장원급제 DNA를 가진 과학기술계 인사라면 100명이 국회에 입성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설사 대통령이 돼도 기대할 게 없다. 지금 국내 과학기술계에서 필요한 것은 장원급제가 아니라 장인 DNA다. 과학기술계 리더들에게 필요한 덕목도 마찬가지다. 그게 없다면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그냥 한 명일 뿐이다.  
 
김형석(과학콘텐츠스토리협동조합 SCOOP 대표)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이해곤 기자
이해곤기자의 다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