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미디어 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글로벌 미디어 리포트 2015'를 통해 내년이면 디지털 미디어 소비 규모가 전통적인 미디어를 뛰어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며 오는 2019년에는 디지털 미디어 소비가 전체 미디어 시장의 55%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시장이 커짐에 따라 많은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디지털 콘텐츠 제작·유통에 나서고 있다. 스마트카, 가상현실, 스마트홈 등 차세대 플랫폼에서는 콘텐츠의 중요성이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기업들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뉴스토마토 원수경기자] 성장세가 둔화돼 가고 있는 ICT 시장에서 '콘텐츠 서비스'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ICT 시장은 단기적인 정체기에 접어든 상태다. 최근까지 성장을 주도해왔던 스마트폰 시장은 성장률이 반 토막 나며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물인터넷(IoT)이나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 미래 기술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이들 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거대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 방송이나 영화, 음악, 게임과 같은 콘텐츠 시장이 돌파구가 되고 있다. 구글이나 애플, 아마존 같은 ICT 기업들도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글로벌 ICT 기업들의 '이유있는' 콘텐츠 사업 확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ICT 기업들의 콘텐츠 사업이 2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지금까지는 자체 제품이나 서비스를 차별화하는 수단으로 콘텐츠를 활용했다면 이제는 콘텐츠를 사업 포트폴리오의 한 축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애플·구글 등, 콘텐츠 서비스 본격 확장
지난 5월 파이낸셜타임즈는 애플이 HBO와 CNN 등을 가지고 있는 미디어기업 타임워너를 인수하려했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인수 협상이 초기 단계에서 멈췄지만 콘텐츠 사업에 대한 애플의 욕심을 확인할 수 있는 소식이었다.
애플은 콘텐츠 사업의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애플은 지금까지 아이튠즈나 앱스토어 같이 폐쇄적 환경의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선보인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애플뮤직은 다른 플랫폼에서도 구동할 수 있는 개방성을 갖췄다. 과금 방식도 앱스토어 식의 중개 방식이 아니라 월 9.99달러를 애플이 직접 가지고 가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자체 콘텐츠 제작에 연 수억달러를 쏟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애플이 인수한 비츠일렉트로닉스의 창업자 닥터드레의 일대기를 그린 6부작 드라마를 이미 제작하고 있으며, 방송·뮤지컬 제작자 등과 함께 애플의 앱 생태계와 관련한 드라마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도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구글은 지난해 월 9.99달러에 광고 없이 유투브를 감상할 수 있는 '유튜브 레드'를 선보이며 다양한 자체 콘텐츠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파이트 오브 더 리빙 데드(Fight of the Living Dead)', '스캐어 퓨다이파이(Scare PewDiePie)', '싱 잇(Sing It)' 등 다양한 오리지널 콘텐츠 시리즈를 내놨다.
구글과 애플 등 글로벌 ICT 기업들이 자체 콘텐츠 제작에 나서는 등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구글은 '유튜브 레드'를 통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자료사진/뉴시스
최근 구글은 더 나아가 월 35달러수준에 여러 방송 채널을 묶어 제공하는 '유튜브 언플러그드(가칭)'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서비스 명칭에 플러그를 꼽지 않아도 된다는 '언플러그드'가 있다는 점을 통해 구글이 본격적으로 유료 방송과의 경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이미 지난 2010년부터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어 온 아마존은 콘텐츠 사업 영역을 영화 제작 및 투자에서 배급으로까지 화장하고 있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선보였던 우디 앨런 감독의 '카페 소사이어티'나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등이 아마존이 배급을 맡은 작품이다. 아마존이 기술 개발 뭋 콘텐츠 확보를 위해 투자하는 비용은 지난 2013년 전채 매출의 8.9% 수준에서 지난해 11.9%로 높아졌다.
아마존은 콘텐츠 사업을 독자 사업으로 분리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프라임비디오'를 별도로 출시했다. 선두주자인 넷플릭스보다 1달러 저렴한 요금을 제시하는 등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밖에도 중국의 알리바바는 지난 2014년 차이나비전미디어를 인수하고 알리바바픽처스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영화 투자, 배급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미국의 트위터도 올해 독일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사운드클라우드에 7000만달러를 투자해 콘텐츠 시장에 진출했다.
"콘텐츠는 검증된 수입원…신기술로 수익성 높여"
LG경제연구원은 ICT 기업들이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는 이유에 대해 "콘텐츠는 불확실성 시대의 검증된 가치 요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애플이나 구글 모두 미래 먹거리인 IoT나 VR 등에도 투자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들을 통한 수익모델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IoT의 경우 가트너는 2020년 시장 규모를 1조9000억달러로 예상하지만 시스코는 19조달러로 예상하는 등 편차가 크다.
반면 콘텐츠로는 이미 거대한 시장이 형성돼 있다. 맥킨지의 '글로벌 미디어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가정용 비디오 시장은 3320억달러, 게임 시장은 940억달러를 기록했다. 3290억달러 규모인 스마트폰 시장보다 콘텐츠 시장이 더 큰 것이다. 스마트폰과 같이 콘텐츠 소비에 최적화된 디바이스가 보편화되고 개인이 여가시간을 즐기는 문화가 강해지면서 콘텐츠 소비량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북미의 경우 모든 연령대에서 콘텐츠 소비 시간이 매년 25%씩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주요 콘텐츠 시장과 ICT 시장 규모. 콘텐츠 시장 규모가 이미 스마트폰 시장을 넘어섰다. 자료/LG경제연구원
콘텐츠 서비스에 새로운 첨단 기술을 접목할 수 있게 된 점도 기업의 참여를 이끌고 있다. 첨단기술로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원 스트리밍업체 스포티파이는 지난 2014년 머신러닝 기술 기업인 에코네스트를 인수하고 해당 기술을 통해 더욱 고도화된 음악 추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블로그와 SNS 데이터를 조합해 50억개로 음악 취향을 세분화하고 사용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음악을 즐겨듣는지를 분석해 추천하는 식이다. 또 '러닝' 기능을 활용할 경우 스마트폰 센서로 사용자가 달리는 속도를 체크해 템포에 맞는 음악을 재생해준다.
넷플릭스가 지난 2013년 제작해 에미상 3개 부문을 석권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는 빅데이터 분석 알고리즘을 활용해 만들어졌다.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드라마 장르와 감독, 배우를 분석해 데이비드 핀처 연출, 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정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넷플릭스는 다른 드라마의 제작 타당성을 검토하는 단계에서도 빅데이터를 활용했다.
신재욱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신들이 강점을 지닌 첨단기술을 활용할 여지가 커지는 한 ICT 사업자들은 콘텐츠 서비스를 지속 강화할 것"이라며 "애플의 시리, 구글의 구글어시스턴트, 아마존의 알렉사 등 주요 기업들의 인공지능 플랫폼은 콘텐츠 서비스와 빠르게 접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묶음' 위주의 콘텐츠 소비 방식이 약화된 점도 ICT 기업의 콘텐츠 시장 진입을 가속화했다. 기존에는 방송 사업자가 여러 콘텐츠를 묶어 제공하는 '번들링(Bundling)' 모델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음악 소비가 앨범에서 음원으로 바뀌고 방송 소비도 채널에서 개별 콘텐츠로 바뀌면서 시장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졌다. 현재는 넷플릭스처럼 소비자가 원하는 개별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모델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향후 ICT 생태계의 주도권 싸움에서도 콘텐츠는 중요하다. 자율주행 기반의 스마트카나 스마트홈, IoT, VR 등 다양한 미래 환경에서 콘텐츠가 핵심 요소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는 2020년 VR·AR 시장이 131억달러 규모로 커질 것으로 전망하면서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78억달러가 비디오게임과 비디오엔터테인먼트 등 콘텐츠 분야가 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신재욱 연구위원은 "ICT 사업자들로서는 콘텐츠 중심의 사업 역량 및 소비자 기반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수밖에 없다"며 "최근 ICT 기업들의 콘텐츠 사업 확대 움직임은 일시적 트렌드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원수경 기자 sugyu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