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제3인류'와 '서경배 과학재단'

입력 : 2016-09-06 오전 10:10:26
소일 삼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를 읽고 있다. 급하게 읽다가 2권에서 멈췄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천천히 읽는 중이다. 솔직히 이 소설을 너무 만만하게 봤기 때문이다. 책을 펴자마자 인류의 조상이 17m 크기의 거인이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과학 소설이지만 이건 너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재미가 반감됐다.  
 
다시 보니 처음에 안 보였던 대목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프랑스 대통령은 마약과 여자에 찌들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과학적 정책을 논할 때는 더없이 진지하다.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오로르 카메러 박사는 동성애자이자 스트립 댄서로 일한다. 이런 대목에서 상상력의 차이를 발견한다. 제도적·문화적으로 자유로운 곳에서 상상력은 꽃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자 재미가 배가됐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연구 과제를 선정하는 과정이다. 주제만 좋다면 신청 자격은 제한이 없다. 저명한 석학의 아들도 지원할 수 있고,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연구자도 지원할 수 있다. 소속 기관도 무관하다. 심사장에서는 발표 주제를 놓고 제안자와 심사위원 간의 격렬한 토론이 전개된다. 소설에서 행사를 주관한 소르본 대학 측은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연구 프로젝트를 최종 우승자로 선정한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이번엔 국가가 나선다. 최종 후보에 올랐다가 탈락한 두 개의 프로젝트(여성화를 통한 방사능 저항력 강화, 소형화를 통한 세균 저항력 강화)를 정부가 지원하기로 한다. 단 전제조건 있다. 두 연구 프로젝트 제안자들이 상호 협력해서 연구를 진행할 것. 쉽게 말해 ‘융합 연구’를 조건으로 지원을 결정한 것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두 명의 박사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한창 <제3인류>를 읽는 재미에 빠져있을 때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과학재단 설립 소식을 접했다. 서 회장은 회사 돈이 아니라 사재(私財) 3,000억 원을 기부해 ‘서경배 과학재단’을 설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재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름을 거는 것보다 더 확실한 약속은 없다. 재단이 잘못되면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기 위해 이름을 걸었다.” 
 
서경배 과학재단은 ‘혁신적 과학자의 위대한 발견을 지원해 인류에 공헌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생명과학 분야의 기초연구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한국인 연구자를 지원한다. 매년 공개 모집을 통해 3~5명의 연구자를 선발, 과제당 최대 25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는 재단을 만들기 위해 기부 규모도 1조 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식이 반가운 이유는 소설 속 이야기를 현실에서도 목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동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차이점'에 주목했다면, 앞으로는 '공통점'에 밑줄을 그을 수도 있겠다는 즐거운 상상 때문이다. 올 11월 과제를 공고하고, 내년 6월 지원자를 확정한다는 데 지원자격도 없는 내가 벌써 가슴이 뛴다. 과연 누가, 어떤 연구 주제로 지원을 받게 될까? '제3의 인류'가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바꿀 새로운 희망을 상징한다면, 우리 손으로 그 희망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서 회장은 어릴 적 만화영화 주인공인 ‘아톰’을 보며 과학에 대한 꿈을 품어왔다고 한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서 회장은 만화영화뿐만 아니라 책도 즐겨 읽었으리라 짐작한다. 그의 독서목록에는 경영서 외에도 문학 작품, 특히 <제3인류>와 같은 장르 소설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 서 회장에게서 그 힘을 목격한다. 
 
뱀의 발[蛇足] 하나. 과학기술 관련 부처 장·차관이나 기관장의 필독서로 <제3인류>를 권한다. 무엇보다 과학자와 연구를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임용할 때 공적서 대신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과학자들에게는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지금 하는 연구가 자칫 초라하게 보일 수 있으니까.  
 
김형석 과학 칼럼니스트·SCOO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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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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