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우찬기자] ‘왕실장’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다시 한번 '법률 미꾸라지'라는 별명에 걸맞는 면모를 드러냈다. 자신에게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고, 의원들의 지적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존재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명백한 증거로 남아 있는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비망록)에 드러난 각종 공작 의혹도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 등에 대해서는 대통령을 잘 보필하지 못한 책임은 통감한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실세 비서실장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정례적으로 만나지도 못했다고 주장하고, 정윤회 문건 파동조차 보고도 안했다고 해 "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장 수준이 이것 밖에 안되냐"는 호통을 들었다.
업무수첩에 기재된 내용도 전면 부인
김 전 실장은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에 비서실장의 지시사항으로 기재된 내용도 모두 부인했다. 그는 “청와대 수석 회의는 각 수석들과 함께 소통하는 자리다. 실장이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회의가 아니다. 각자 자기 소관 상황을 보고하고 의견을 나눈다”면서 “비망록에는 회의 참여자와 작성자 생각이 혼재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공작정치 의혹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 전 실장은 “비망록을 직접 본 적도 없고, 누가 작성했는지 알 수 가 없다”며 “노트를 작성할 때 작성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도 가미됐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2014년부터 지난해 1월까지 작성된 비망록에 따르면 법원 길들이기·언론 통제·문화계 블랙리스트 대응 등의 내용들이 김 전 실정의 지시로 추정되는 장(長)과 함께 쓰여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해 헌법재판소와 교감으로 사전에 김 전 실장이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비망록 보도와 관련해서도 “통합진보당 해산은 정부가 국무회의서 제소하기로 하고 헌재서 결정했다. 사전에 알고있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다. 완전한 루머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실장은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에 앞서 '문체부 길들이기' 일환으로 문체부 1급 6명 경질 인사에 개입한 의혹에 대해 “제가 자르라고 한적 없다”고 부인했다.
‘리틀 김기춘’ 우병우 발탁도 "대통령이 한 일"
김 전 실장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청와대 입성에도 관여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우 전 수석을 민정비서관으로 누가 지명했느냐는 새누리당 이종구 의원의 질문에 “대통령이 지명했다. 의사를 확인하라고 해서 제가 면담한 일이 있다”며 자신이 발탁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앞서 우 전 수석의 장모 김장자 삼남개발 회장과 최순실씨, 차은택씨 등 국정농단 세력들이 2014년 6월 초 김 회장이 운영하는 기흥CC에서 모여 골프를 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 골프회동은 우 전 수석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내정된 뒤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김 전 실장은 “우 전 수석이 최순실 백으로 들어온 거 아니냐”는 질문에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비선실세’로 국정농단의 핵심인물인 최순실씨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김 전 실장은 최씨의 존재를 알고 있지 않느냐는 의원들의 추궁에 “최순실을 모르냐고 다그치시는데 최씨를 알았다면 뭔가 연락하거나 통화한 흔적이 있지 않겠는가. 검찰서 다 알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믿기 어렵겠지만 만난 적 없고, 통화한 적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씨는 “최순실이 김기춘 실장한테 연락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고, 김 전 실장은 “대통령 말씀을 듣고 차은택을 불렀다. 그 과정은 모른다”며 최씨의 존재를 몰랐다고 또다시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은 “권력 1인자는 결국 최순실”이라고 비판했다.
세월호 7시간에는 “사사로운 행적 알 수 없어”
김 전 실장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그러나 사라진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서 모른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이 90분가량 머리손질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과 관련해 김 전 실장은 “관저에서 사사롭게 일어나는 일을 제게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몇 시에 머리손질 하시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새누리당 최교열 의원이 “세월호 참사 당일 오후 정모 원장이 대통령의 머리손질을 했는 것 알고 있느냐. 청와대 출입기록에도 있다고 한다”고 캐물었고, 김 전 실장은 “몰랐다. 외부 사람이 오고가는 경우는 비서실은 모른다. 경호실이 관리한다”고 피해갔다. 황영철 의원이 “머리손질 담당인 정모 원장이 비서실 계약직으로 근로계약을 맺었다는 자료를 받았다. 임명자가 김기춘 실장이다. 정말 정모 원장을 모르느냐”고 따졌다. 김 전 실장은 “잘 모른다. 총무비서관실에서 하는데 명의가 내 이름으로 나갔는지는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김 전 실장은 세월호 시신 인양을 하면 안 된다고 지시한 의혹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고, 지시한 적 없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김경진 의원은 “2014년 10월27일치 김 전 수석 비망록에 ‘장(長) 시신인양X 정부책임 부담’이라고 쓰여 있다”며 “김 전 실장이 시신인양을 하면 안 된다고 지시한 것”이라고 질책했다. 김 전 실장은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을 못해서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정회되자 통화를 하며 청문회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우찬 기자 iamrainshin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