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광연기자] 뇌물수수 등 총 13가지 혐의를 받으며 국정농단 사건 공범으로 지목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헌정 사상 최초인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으로 파면당한 지 11일 만에 검찰에 나온 박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는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4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는 불명예를 안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정해진 출석 시간보다 6분 앞선 오전 9시24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에 도착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을 떠난 지 8분 만에 청사 앞에 선 박 전 대통령은 승용차에서 내려 잠시 포토라인에 선 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라고 짧게 출두 소감을 밝혔다. 전날 박 전 대통령 측은 박 전 대통령이 검찰 출두에 앞서 메시지를 밝힐 것이라 언급해 그 내용에 관심이 쏠렸지만, 정작 이날 원론적인 말을 하는 데 그쳤다. 조사를 앞두고 있는 민감한 시점에 검찰을 자극할 만한 발언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취재진이 곧바로 검찰 수사가 불공정했다고 생각하는지, 아직도 이 자리에 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물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청사 안에서 박 전 대통령은 검찰 간부들이 주로 타는 금색 엘리베이터 대신 일반인용을 이용해 10층 특수1부 검사실 옆 1002호 휴게실로 향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검사장급인 노승권 1차장 검사와 10분가량 차를 마시며 이날 조사 일정과 진행 방식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들었다. 노 차장검사가 이 사건 진상규명이 잘 될 수 있도록 협조할 것을 요청하자 박 전 대통령은 성실히 잘 조사받겠다고 답했다.
티타임 후 박 전 대통령은 오전 9시35분경부터 오후 12시5분까지 일반 검사실을 개조한 10층 1001호실에서 한웅재 형사8부장검사에게 조사를 받았다. 특이 사항 없이 조사가 진행됐고 1시간 정도의 점심시간에는 미리 준비한 김밥, 샌드위치, 유부초밥이 든 도시락을 먹었다. 오후 1시10분부터 다시 한 부장검사에게 조사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은 이후 이원석 특수1부장검사에게도 조사를 받았다. 이날 검찰 측에서는 배석검사 1명, 수사관 1명도 조사에 참여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유영하, 정장현 변호사가 번갈아가며 조사를 지켜봤고 손범규, 서성건, 이상용, 채명성 변호사가 대기했다.
이날 박 전 대통령의 조사 상황은 영상으로 남지 않았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동의하지 않아 조사 상황을 영상 녹화하지 않기로 했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변호인 손범규 변호사는 "녹화를 거부한 사실이 없다"며 "법률상 검찰이 피의자에게 동의 여부를 묻지 않고 녹화할 수 있는데 불구하고 동의 여부를 물어 동의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날 특수본은 박 전 대통령을 상대로 그간 13가지 피의 사실이 담긴 질문지를 가지고 신문했다. 특히 대기업들의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을 종용했는지와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위해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찬성 의결을 지시했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 조사를 마치는 대로 조만간 구속영장을 청구하거나 불구속기소할지 정할 방침이다. 하지만 뇌물공여 혐의로 이 부회장이 이미 구속기소 된 상황에서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박 전 대통령도 구속 수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또 헌재도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한 혐의를 인정한 만큼 검찰로써도 결국 고민 끝에 영장 청구 카드를 꺼내들 것이란 분석이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부터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특수본 1기로부터 직권남용·강요·공무상비밀누설·강요미수 등 총 8가지 혐의를 적용받았다. 이후 수사를 펼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여기에 뇌물수수·직권남용 등 5가지 혐의를 추가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특수본 1기와 특검의 수사 결과에 대해 "완전히 엮은 것"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검찰과 특검의 대면조사 요구도 검찰의 수사 편향성과 특검의 조사 일정 사전 노출 등을 이유로 거부했었다. 하지만 이번 특수본 소환 통보를 받은 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최대한 자세를 낮추며 구속수사만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조사실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광연 기자 fun35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