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실현 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이 4월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차기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30개 핵심과제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고대했던 새 정부가 출범했다. 경제민주화를 다짐하며, 불평등에 시름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약속했다. 녹록치 않은 현실에 기대만큼 우려도 크다. 재벌은 시장에서의 우월적 지배권을 향유하며 약육강식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 취업난과 소득 불평등은 청년들을 구조적 절망에 빠트렸고, 공정한 경쟁 기회조차 박탈되면서 우리사회를 ‘흙수저·금수저’로 양분했다. 그 와중에 재벌과 권력이 맞닿은 국정농단 사태로 경제민주화를 재차 갈구하는 촛불민심에 불을 지폈다. 이는 정권교체와 국정운영의 원동력이지만, 여소야대로 짜여진 국회는 장벽이 될 공산이 크다. 기득권의 저항과 반격도 예상된다. 정쟁과 분열의 연속은 피로감의 누적을 낳을 수도 있다. 쉽지 않은 싸움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한걸음이라도 내딛어야 하는 '길'이다. <뉴스토마토>가 지면 창간 2년을 맞아 다시 '경제민주화'를 시대적 의제로 꺼내든 이유다. (편집자)
[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개정된 헌법 제119조 2항으로, 일명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통한다. 분배와 조화를 위해 국가가 시장에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헌법에서 그 근거를 제시했다. 무분별하게 시장을 유린하는 재벌에 대한 비판과 통제의 필요성으로 해당 조항이 가까스로 헌법에 삽입됐지만, 이후 사실상 이념적 가치로만 존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권력은 시장(자본)으로 넘어갔다"며 자조했을 정도다.
시대적 요구와 함께 국가의 핵심 정책과제로 본격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19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전후해서다. 불평등으로 점철된 양극화의 심화로 사회가 분열되고 병 들면서다. 18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꺼내들며 야권 의제를 선점하는데 성공했다. 이명박정부의 친재벌 정책인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차별화하며 중도층의 표심을 공략했고, 이는 양자 대결로 치러진 대선에서 신승의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박근혜정부는 출범 이후 재벌의 손을 들어주며 경제민주화를 저버렸다. 국가가 경제민주화를 위해 시장에 가해야 할 규제는 "쳐부숴야 할 원수"와 "암 덩어리"가 됐으며, 그 끝은 정경유착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이었다.
경제민주화 핵심 과제는 재벌개혁이다. 재벌은 순환출자를 통해 지분율에 걸맞지 않는 지배력을 누렸고, 일감몰아주기를 통해 잇속을 챙겼다. 횡령과 배임, 탈세, 비자금 조성 등으로 얼룩진 병폐는 재벌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특히 경영권 세습과 이 과정에서의 불법과 편법, 그리고 집행유예와 사면으로 이어지는 법 앞의 불평등은 거센 민심의 저항을 낳았다. 동시에 이익을 위해서는 골목상권도 침해했으며, 원·하청의 갑을관계는 단가 후려치기와 기술 탈취 등 중소기업에 대한 횡포를 낳았다. 재벌에 대한 과도한 경제력 집중은 국가경제의 체질을 허약하게 했으며, 이 취약점은 재벌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임에도 치외법권 지대로 남는 이유가 됐다.
재벌이 막대한 사내유보금에도 투자와 고용을 게을리 하면서 '낙수효과'는 '고용 없는 성장'으로 대체됐다. 재벌이 요구한 노동의 유연화와 이로 인한 비정규직의 급증, 소득 불평등도 경제민주화 과제다. 줄어든 지갑은 소비절벽과 내수침체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내수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생존을 위협한다. 실제 2015년 1000만원 이하 소득자는 전체 소득자의 38.4%를 차지했다(노동연구원 분석). 전체 소득자의 73.7%는 3000만원 이하 소득에 그쳤다. 혼자 벌어서 3인 가구 평균지출(4085만원)을 충당할 수 있는 가구는 19%에 불과했다.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처럼 직면한 사회적 문제들이 모두 고리로 연결된 탓에 경제민주화 실현 없이는 근본적 처방이 불가능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헌법 낭독을 듣고 있다. 사진/뉴시스
역대 정부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재벌의 반대로 정책에서 밀리기만 했던 공정거래법이 최초로 제정됐다. 대규모 기업집단제도와 출자총액제한제도도 처음 도입됐다. 노태우 정권 때는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제 등이 도입됐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등 재벌로부터 정치권 비자금 흐름을 차단하고자 했다. 김대중 정부는 부채비율 200% 축소, 부당 내부거래 금지 등 재벌개혁 정책을 선보였다. 참여정부 시절엔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화, 재벌의 금융지배 차단 등 시장 개혁 3개년 로드맵이 추진됐다.
하지만 경제민주화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하다. 오히려 그 강도가 더해졌다. 결국 경제민주화 실현 가능성은 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정부의 강력한 실천 의지가 중요하다는 원론으로 돌아간다. 대통령 탄핵까지 이어지며 다른 어느 때보다 재벌개혁 요구가 높았던 20대 국회 앞에 놓여진 소명을 생각하면 상법개정안의 지연은 민심과 배치된다. 봇물 터지듯 입법 발의가 이뤄진 데 비하면 단 한 건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제 짐은 새 정부로 넘겨졌다.
새 정부가 경제민주화 공약을 관철하기엔 여소야대의 현 국회 지형을 넘어야 한다. 협치가 중요한 정치구도에서 ‘경제권력’의 맥을 끊고자 강경한 재벌개혁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지 만만치 않은 시험대에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벌개혁에 대한 다짐과 경제민주화 실천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역대 최대 표차의 당선은 그의 경제민주화 의지에 대한 민심의 요구다. 되돌릴 수 없는 경제민주화 길로 새 정부가 들어섰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