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경주 손씨(孫氏) 종가의 고문헌 등 유물들을 기탁 받으러 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안승준 책임연구원은 주인에 의해 버려질 예정이던 라면박스를 가져가 이듬해인 2003년 그 박스 안 고서들의 정체가 1346년 완성된 원나라의 마지막 법전 ‘지정조격(至正條格)’의 일부임을 발표한다. 거의 66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내고 극적으로 발굴된 이 귀중한 사료는 이후 연구 결과 2007년 세계 유일본으로 밝혀져 국내외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2010년에는 몽골 대통령과 몽골 방문단이 이 유물을 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2010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찾은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몽골 대통령(가운데)이 세계 유일의 원나라 시대 법전 원본인 ‘지정조격(至正條格)’을 보는 모습. 사진/뉴시스
고려와 원나라
원나라의 마지막 법전인 ‘지정조격(至正條格)’은 원 혜종(혹은 명 태조 주원장의 명명에 따라 순제(順帝)로도 불리는) 토곤테무르(1320~1370, 재위: 1333~1368년)의 연호인 지정(至正)에 그 이름의 유래를 두고 있다. 이 법전은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초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고려와 조선의 법제사 연구, 나아가 당시 사회제도와 풍습·언어 등의 연구에도 일조하는 중요한 사료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 원나라의 제11대 칸이자 북원의 제1대 황제(재위: 1368년~1370년)인 원 혜종 토곤테무르의 황후들 중 한 명이 바로 고려 출신의 기황후이다.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의 황후 기씨
몽골 이름 완췌후두(完者忽都) 그녀
본디 고려 처녀
행주 기씨 72대손
기자오의 5남 3녀 중
막내딸 그녀
1231년 원나라 침략 이래
30년 동안
일곱 번이나 침략
30년 뒤
그 원나라에 투항
이때부터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고
고려의 처녀들이
원나라 공녀(貢女)로 바쳐졌다
80여년 동안
고려 처녀들이
원나라 황실에 끌려가
차 따르고
술 따랐다
더러는 고관대작 첩이 되거나
궐 밖으로 내쳐져
색주가 작부 되거나
연경성 안
서른 몇 술집
고려 기생이 아장바장 값나갔다
송도 벽란도에서 배 타고
바람과 물길 타면
네 시간 지나 원나라 바닷가에 이른다
그런 뱃길 배 밑창에
몇십명씩
몇백명씩 실려간 공녀 중
기자오의 막내딸 그녀
떴다 봐라
원나라 황실 궁녀로 들어갔다
어럽쇼
어럽쇼
1339년 황후로 책봉되니
원나라의 권세 한몸에 입고
고려의 왕실조차
황후의 예로 멀리 받들었다
< … >
기황후 그녀
원나라 마지막 천하 권세
한몸에 걸쳤다
원나라 들쥐
고려 들쥐
그 권세에 모여들었다
어럽쇼
(‘기황후 권세’, 24권)
<만인보>는 통상적으로 추정되는 바와 같이 기황후를 공녀 출신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사실 이를 확실히 입증하는 사료는 없다. 다만 <고려사>·<원사(元史)>·<신원사(新元史)>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고려인인 그녀가 1333년 원나라의 황궁에 들어가 황제에게 차(茶)를 올리는 궁녀에서 1335년 후궁이 되었다는 것, 당시 황후인 타나시리의 질투를 받기도 했으나 1339년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고 1340년 제2황후가 되었으며, 1365년에는 결국 제1황후에 오른 권력투쟁의 승자라는 것, 원에서 또 고려에서 그녀가 휘두른 권력은 막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인보>는 다음의 시를 통해 그녀에 대한 상세정보를 생동감 있게 제공하고 있다.
한 처녀의 커다란 운명 있다 사막 꽃이 아니라 사막이었다
1333년 원나라 공녀(貢女)로 끌려갔다
울음의 길
원나라 도읍 연경 대궐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눈에 번쩍 들었다
울음 접고
궁녀의 길 익혀갔다
몽골어
몽골 풍습을 익혔다
고려 풍습을 새삼 애틋하게 익혔다
용꿈 뒤 별궁에서 순제의 눈에 들었다
운우지정
황후 타나시리가
온갖 학대를 다했다
황후 축출의 정변이 일어났다
기궁녀는
순제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았다
황후 책봉
그로부터 고려 여인 기황후
원나라 전권을 떡 주무르고 양념 주물렀다
속국 고려에서도
그녀의 친정에서 권력을 주물렀다
고려 금강산 장안사도
원나라 황실 원찰이 되어 범패소리 바라소리 쉬지 않았다
< … >
고려 충숙왕이야 기황후의 하인이 되어
기황후의 서찰 분부를 엎드려 받드는 변방 제후 노릇
(‘기황후’, 19권)
기황후는 고려 측에서나 원나라 측에서나 별로 긍정적인 존재는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반원(反元)·독립정책을 펴려던 공민왕에 대립해 싸운 존재이고, 원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 게다가 속국 출신의 황후가 권력을 휘두르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공녀로 끌려간 것을 전제할 때 발생 가능한 물리적·심리적 상황들이나, 원나라 황궁에서 고려인 출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이었을 세(勢) 형성과 암투 등을 짐작할 수는 있겠다.
합류 대(對) 분류, 혹은 동질 대 이질
1206년 칭기스 칸이 몽골제국을 건설한 이후, 그의 손자로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이자 원의 초대 황제인 원 세조 쿠빌라이 칸(1215~1294, 재위: 1260년~1294년)으로부터 초원으로 쫓겨나 북원으로 축소된 원의 마지막 황제 혜종 토곤테무르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는 광대한 영토의 정복자로 세계사에 족적을 남기고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몽골인들의 역사는 계속되어 나라가 1688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복속되었다가, 1911년 제1차 혁명과 1921년 제2차 혁명을 거쳐 독립을 한다(외몽골). 1924년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소련의 영향을 받아온 몽골인민공화국은 1989년 말부터 시작된 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헌법을 개정해 1992년 시장경제정책과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몽골국(Mongol Uls)이 된다. 1368년 원나라의 멸망 이후 거의 끊어졌다고 볼 수 있는 한·몽골의 교류―물론 사회주의 국가시절의 몽골과 북한과의 교류는 별도로 하고―가 다시 활성화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이니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다.
남한의 16배나 되는 넓은 땅이지만 인구는 약 3백만 명에 불과한 몽골을 방문해 본 한국인이라면 단지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 문화와 풍습, 언어구조의 유사성에 놀라 양국이 얽혀 있는 역사적 원류에 의문과 호기심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장기간 일하고 돌아간 몽골인들이 많다보니 도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다보면 아마 스무 명에 한 명쯤은 한국말을 조금씩 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시골에 가 아이들이 노는 것을 살펴보면 예전 우리 아이들이 놀던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담축제에서 동물 복사뼈로 공기놀이를 하는 몽골인들. 사진/필자 제공
단지 공기놀이의 공깃돌이 양·염소·말과 같은 동물의 복사뼈로 되어 있다는 것, 실뜨기놀이 역시 동물의 뼈에 고정시켜 한다는 것 정도가 다를 뿐이다. 몽골인들이 타는 조랑말은 제주도의 조랑말을 연상시킬 것이고,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7월의 나담(naadam)축제에서 그들이 씨름을 즐기는 모습은 김홍도의 ‘씨름’을 떠올리게 할 것이며, 활쏘기와 말타기 대회에 나서는 이들은 고구려의 조상들을 상기시킬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몽골인들은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미니멀’한 삶을 살아왔고 한국인들은 정착민의 무게를 안고 안팎을 가꾸며 살아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나담 축제 활쏘기 대회에 참가하는 여성들. 사진/필자 제공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후예들
몽골제국 시기, 세계의 여러 민족들이 그랬듯이, 고려가 겪은 수난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다. 비록 80여년을 속국, ‘부마국’으로 살아야 했지만, 약 30년 동안 대몽항쟁을 펼친 고려 백성들의 저력은 경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고려가 강화도 피난 도읍에서
30년을 견디어냈다 어련무던하였다
결코 몽골에 굴복하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은 댓가로
전국토가 짓밟혔다
익어가는 벼에 불질러
잿더미가 되었다
1231년 고려 백성 20여만 포로로 끌려갔다
허수아비 왕 고종이
무신들의 손아귀 벗어나
제 왕권을 찾으려고
몽골에 굴복했다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
나라 안의 허수아비가
나라 밖의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다
고종 이은
원종도
몽골 인질 왕자로 돌아와
임금이 되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왕비는 몽골 공주였다
그뒤 몽골에 내리 충성 바치는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몽골 사위가 고려 왕이고
몽골 공주가 고려 왕비였다
그런 날들 지나
공민왕의 북벌의지 이어
단 한번 몽골을 쳐들어가다가
만주를 쳐들어가다가 말고
그 고려 북벌의 뜻 거슬러
군대를 돌리니
그것이 조선의 시작이었다
애달프도다 공민왕
옛 고구려를 꿈꾸었다가
한 예술가로 돌아가
그림에 파묻혔다
노국공주 왕비의 그림에 파묻혔다
< … >
(‘고려 고종’, 27권)
왕과 무신정권의 힘겨루기 사이에서 몽골군에 저항하다 죽어간 이들은―늘 그렇듯이!―평범한 백성인 농민들, 노예들이었다. 대몽항쟁 기간 동안 대장경 등 불교문화재가 소실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력(佛力)으로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몽골의 경우 전통종교인 샤머니즘의 바탕 위에 티벳불교가 전파되어 있다가 사회주의 시절 스탈린에 의해 불교사원들이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졌던 것을 생각하면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센트럴 스타디움에서 나담 축제의 개회식이 열리는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