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효정·정재훈기자] 골판지 시장이 메이저 업체(일괄기업) 위주로 재편되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을 전후해서다. 지난 2006년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가 해제되면서 대형사들을 중심으로 문어발식 사업확대가 이뤄졌다. 일괄기업들은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며 인수가치가 있는 전문기업들 위주로 집어삼켰다. 그 사이 우성판지와 신성CIP, 거상수출포장, 대동판지, 동국판지 등 굵직한 판지사들은 M&A(인수·합병)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
원지사로 시작해 판지사를 흡수한 곳은 대양그룹과 아세아그룹이다. 현재 대양그룹은 신대양제지, 대양제지 등 원지사 2곳과 판지사 5곳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아세아그룹 역시 원지사인 아세아제지와 경산제지 이외에 3곳의 판지사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판지사로 시작해 원지사를 껴안은 곳은 태림포장그룹과 삼보판지그룹이다. 태림포장그룹은 태림, 월산, 동원페이퍼 등 3곳의 원지사를 계열사로 가지고 있으며, 삼보판지그룹도 원지사 2곳과 판지사 5곳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오른 주머니서 돈꺼내 왼 주머니로 챙기기"
M&A를 통해 몸집을 불린 4대 메이저사는 골판지 전문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시장을 독점했다. 골판지산업이 원자재 구성비가 높은 저부가가치 중소기업형 산업이라는 점이 이를 가능케했다. 골판지 산업의 시장구조는 '원지(이면지·표면지·골심지)→원단(골판지)→상자'로 이뤄진다. 원가 구성상 원자재 비중이 60~70%에 달한다. 때문에 산업 시작점에 있는 원지의 가격이 인상될 경우 원단에 이어 상자 가격까지 일제히 올라야 중간 단계에 있는 판지사의 경영이 유지되는 구조다. 문제는 4대 대형사들이 원지값만 지속적으로 올린채 마지막 제품인 상자값은 소폭만 올리는 방식으로 판지사들의 시장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판지사들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내부 출혈도 피할 수 없었다. 일괄기업 내 판지사 계열사들도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원지 가격인상을 통한 원지사들의 수익으로 이를 만회해왔다.
원지 분야를 주력하고 있는 아세아그룹은 지난 2007년 원지부문 영업이익률이 10.27%인 반면 판지부문은 2.36%의 영업손실율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대양그룹도 원지부문에서는 7.48%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지만 판지부문에서는 0.70%에 그쳤다. 올 상반기 영업이익률에서도 뚜렷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양그룹 내 원지사인 신대양제지의 올 상반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494억원, 78억원으로, 영업이익률 5.24%를 기록했다. 판지사인 대영포장은 신대양제지보다 더 많은 매출액인 1515억원을 기록했지만 2억5265만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업계 관계자는 "일괄기업들은 원지에서만 이익을 실현시키면 된다는 생각으로 판지와 상자제조 기업들을 죽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내부거래로 매출잔치…태림페이퍼 매출 85%, 계열 판지사로부터
원지사들을 최상단으로 구축된 수직계열화는 결국 내부거래로 이어졌다. 원지사들은 계열 판지사로부터 많게는 85%의 매출을 얻고 있다. 이로써 다른 원지사의 신규진입을 차단해 독과점 시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뉴스토마토>가 각 사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대양그룹 내 원지사 2곳(신대양제지, 대양제지공업)의 매출액(3426억8400만원) 가운데 71.78%가 계열 판지사 4곳으로부터 발생했다. 태림포장그룹도 원지사 3곳의 매출액(4000억9200만원) 가운데 70.14%가 계열 판지사인 태림포장으로부터 나왔다. 삼보판지그룹과 아세아그룹의 경우 원지사가 계열 판지사로부터 얻은 매출비중이 각각 48.97%, 26.40%로 조사됐다. 이는 제지사와 판지사간 내부거래에 한정된 수치로, 원지사간 거래까지 더하면 그룹 전체 내부거래 비중은 이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때문에 내부거래가 부의 편법 승계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괄기업이 주무르는 골판지 시장 내에서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지자 판지업계는 정부차원에서 뿌리 박힌 불공정 관행을 제거해줄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역시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 중소기업의 부당 내부거래에 대해서도 규제를 엄정하게 집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판지업계는 원지사들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유권해석을 요청했으며, 차후 신고 조치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임효정·정재훈기자 em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