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가면과 익명…숨은 진심

입력 : 2018-05-31 오후 2:48:20
신상윤 산업1부 기자.
하얀 가면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가면을 쓰고 발언대에 오른 그들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뒤덮였다. 손에는 저마다 촛불이 들려 있었다. 시민들이 그들을 응원하며 힘을 보탰다. 재벌의 횡포에 모두가 경악했고, 더 이상 이런 불행한 사태는 없어야 한다는 간절함이 울음과 촛불에 담겼다.
 
시작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막내딸 조현민의 물컵 갑질이었다. 많은 직원들이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분노도 했지만, 분을 삭여야만 했다. '땅콩회항' 당시 박창진 사무장이 겪었던 고통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에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갑질 논란은 대한항공을 이용한 조 회장 일가의 명품 밀반입 등 각종 폭로로 이어졌다. 명백한 범죄였다.
 
직원들은 메신저 속 익명 채팅방을 찾았다. '대한항공 갑질 불법 비리 제보방'이라는 이름의 채팅방은 현재까지 모두 3개가 만들어졌다. 최대 1000명까지 입장할 수 있는 채팅방에는 대한항공 직원들을 비롯해 기자와 일반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익명의 힘은 컸다. 총수 일가를 향한 각종 제보가 쏟아졌고, 일부는 기사화됐다. 관세청을 시작으로 경찰과 검찰, 국세청 등 사정기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익명 채팅방에선 촛불집회 아이디어도 나왔고, 채증을 피하려면 가면을 써야 한다고도 했다. 맨얼굴로 집회에 참여했을 경우 신분이 노출돼 회사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들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주인공이 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썼다. 일부는 가면도 불안해 모자와 스카프 등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시민들도 동참했다.
 
누군가는 익명에 숨은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가면에 숨은 사람들이 대한항공 직원들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익명과 가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절박한 상황은 외면됐다. 특히 자신이 속한 기업의 총수와 맞서는 데 있어 직원 개개인의 힘은 약할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의 힘을 빌릴 수도 있었겠지만, 직원들은 스스로의 길을 찾았다. 익명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하고, 가면을 쓴 채 단체행동까지 나아갔다.
 
익명과 가면에 기대면서도 용기를 낸 대한항공 직원들의 진심은 무엇일까. 그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입사한 대한항공에서 인간답게, 당당하게 일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조 회장 일가가 익명과 가면을 핑계삼아 직원들의 진심을 외면한다면 대한항공 사태는 반복될 것이다. 대한항공 직원들이 익명과 가면을 벗고 당당하게 "자랑스런 대한항공! 사랑한다 대한항공"을 외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신상윤 산업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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