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하노이서 절감한 가시밭 평화의 길

입력 : 2019-03-04 오전 6:00:00
최한영 정치부 기자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 후 남북관계를 돌이켜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의 책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 70년의 대화'를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김 원장은 책에서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두 달 후인 1972년 9월, 북한 대표단이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해 열린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상황을 설명한다.
 
"처음에는 기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북측 대표단이 지나는 길에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구경했다. 회담은 생중계됐고, 온 국민이 분단 이후 처음 접하는 북쪽 대표의 발언에 귀를 세웠다. 북측 자문위원 윤기복이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 '영광스러운 민족의 수도 평양' 내용의 정치연설을 하자 난리가 났다.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적대'의 바다로 가라앉았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9월15일 기자들과 환담에서 '이 연설로 국민들의 반공정신이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호재가 악재로 바뀐 대표적인 예다.
 
당시 텔레비전을 보던 우리 국민들의 심정과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국제미디어센터에서 기자가 느낀 당황(혹은 황당함)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2차 북미 정상회담 첫 날인 27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북미 정상)는 훌륭한 관계를 갖고 있다"며 분위기를 띄웠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모든 사람들이 반기는 훌륭한 결과가 만들어질 것으로 확신한다"며 화답했다. 둘째날 본 회담 오전까지 좋았던 분위기는 당초 2시간 예정이었던 확대회담이 길어지며 바뀌었다. 백악관이 업무오찬 취소사실을 알리고, 트럼프 대통령 기자회견 일정이 앞당겨지며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긍정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만큼 충격은 더 컸다. 북미 간 말이 엇갈리는 가운데 확대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평화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절감한 하루였다.
 
앞으로도 북미·남북 간 협상 과정에서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결과를 만들어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대화가 교착에 빠졌을 때 최고 지도자의 의지와 방법론, 정책 조정능력이 약해지면 '훈령 조작' 사건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뭘까. 김연철 원장은 책에서 "관계를 주도하지 못하면 상황에 끌려다닌다. 수동적 접근의 결과는 언제나 남북관계의 악화"라며 "기다리면 할 일이 없고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런 점에서 상황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북한은 대화 의지를 계속 보이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중재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더 높은 합의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며 중재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반도의 역사를 바꿀 '결정적 국면'은 객관적 상황인식과 정보, 대화를 토대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내는 과정에서 온다. 문 대통령의 중재는 이를 뒷받침할 상황인식·정보가 확보됐을 때 가능하다. 실무진의 노력이 수반돼야 하는 일이다. 3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또 다시 인내의 시간이 시작됐다.
 
최한영 정치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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