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평적인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원할까?

입력 : 2019-05-22 오전 6:00:00
문제의 일반성
2014년 5월 28일 이제는 은퇴를 한 야구 선수 박찬호는 자신이 선수로 있었고 이제는 류현진 선수가 있는 다저스 구단의 경기장에서 “한국의 날” 행사로 류현진에게 시구를 하고 포옹을 나누었다. 한 스포츠 신문은 이를 기사로 내보내면서 “LA다저스 선후배의 따뜻한 감동”이라는 표제를 달았고, 류현진은 인터뷰에서 “지난해에는 신수 형과 함께해서 뜻 깊었는데 올해는 박찬호 선배님을 모시고 하니 그에 못지않게 뜻 깊다”는 소감을 밝혔다. 우리는 이런 기사를 그냥 흐뭇하게 읽고 넘어간다. 여기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아내는 한 직장 동료가 들려준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서울의 한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지방으로 낙향한 의사 이야기였다. 그만 둔 계기는 동료 의사들의 술자리 문화였다. 그곳 의사들은 종종 여자들이 술시중을 드는 술집에 그를 데리고 갔는데, 그에 대해 거부감을 표출하고 실행하자 선배 의사들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것이다. 깊은 좌절감을 느낀 그는 낙향해서 그곳의 병원에서 일한다고 한다.
 
알다시피 이런 사례를 찾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가령 검찰이나 언론 같은 이른바 엘리트 직업 집단이 얼마나 서열화되어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미생>을 보면, 대기업 조직 내의 인간관계가, 비록 젊은 날 인생의 희비가 교차하는 감동적 드라마를 빚어낼 여지가 있을지언정, 얼마나 위계적인지를(혹은, ‘가족적’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곳에는 실수한 주인공 인턴 사원을 선배 직원이 빌딩 옥상으로 데려가 구보와 오리걸음을 시키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놀라운 것일까, 놀랍지도 않은 것일까?
 
우리는 특별한 인연 속에 관계를 맺은 대통령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우리 사회를 다시금 권위주의로 회귀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최근에 자주 듣는다. 근거가 없지 않은 비판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바로 거기서 멈추기 위한 비판일 경우, 우리 사화에 대한 심층적 진단을 가로막을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은 거기서 멈추지 않기로 하자.
 
앞의 의사 이야기에 대한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 가운데 하나는 -그 악명 높은 ‘술자리와 여자’의 문제를 일단 제쳐둔다면- 한국인의 수직적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언제나 나이를 따지고 선후배를 따지는 것에 대한 비판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어디까지 나아가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저 두 전?현직 선후배 야구 선수의 감동적인 포옹에서도 비판의 날을 거두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 앞에서는 멈추는 것일까? 선후배 관계 그 자체가 나쁜 것일까, 아니면 좋은 선후배 관계와 나쁜 선후배 관계가 있는 것일까? 둘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에,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매번 나이를 따지고 선후배를 따지는 문화는 분명 오늘날 문제가 있다 -문제의 일반성. 하지만 어떻게 후배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좋은 선배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선악의 문제.
 
어째서 이처럼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겨난 것일까? 왜 선악의 문제만 있질 않고 문제의 일반성도 있는 것일까? 왜 좋은 선배와 나쁜 선배를 판단하는 문제만 있는 게 아니라 선후배 관계 일반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선악의 문제만 있을 것이다. 즉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는 있을 수 있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 그 자체를 문제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형제자매 관계는 어떨까? 앞서 인터뷰를 보면 류현진은 박찬호를 “선배님”이라고 부르지만 추신수를 “신수 형”이라고 부른다. 친형은 아니지만 그렇게 부른다. 역시 한국인들은 나이를 따지며, 그런 연후에 호칭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처럼 형 아우를 따지는 문화에도 문제의 일반성이 있는 것일까? 알다시피 있다. 사실 이런 문화가 꼭 아시아적 문화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문화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한국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런 사람이 꼭 서양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역시 마음씨 좋은 든든한 형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이를 따지는 문화에 거부감이 있는 한국인이라도 가족의 동기간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가족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나는 형이거나 오빠이거나 누나이거나 언니이거나 동생이다. 요즘은 한 자녀 가족이 늘어나서 가족 안에서 동기간 경험을 할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가족 안에서 형 아우의 구분은 선악의 문제만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구분을 가족 안에서보다는 가족 바깥에서 더 많이 발견한다. 얼마 전 <시사IN>에는 “가난한 집 아이는 동생도 없다”라는 선정적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 제목의 선정성과는 별도로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한 자녀 가족의 만연이 아이들의 심적 삶에 가져올 일반적 여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족 내에서 동기간 경험이 사라지는 가운데, 이 유소년기의 관계적 자원은 오히려 성인들의 삶 속으로 광범위하게 침투했다. 오늘도 성인들은 한두 살 나이를 꼭 따지며, 형 아우를 따진다. 그렇게 해야 무언가 안심이 된다는 듯이. 수평적 관계는 우리에게 영 맞지 않는 어색한 옷이라도 된다는 듯이.
이른바, 한두 살 나이 차
 
줄리엣 미첼이 지난 2003년 출판한 <동기간: 성과 폭력>이라는 책. 사진/도서출판b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줄리엣 미첼은 2003년에 <동기간: 성과 폭력>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미첼은 기존의 정신분석이 수직적 관계와 수직적 이해방식만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며, 정신분석에 측면적 관계와 관점을, 즉 동기간의 문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한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정신분석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환자의 심적인 현실에 접근해왔다. 부모 가운데서도 처음에는 아버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존 보울비나 멜라니 클라인 같은 이론가들은 어머니를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반동으로 라캉은 다시금 상징적 아버지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론가들은 측면적이고 수평적인 형제자매 관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미첼은 이와 같은 이론적 공백을 문제로 삼으면서, 동기간과 또래집단의 독자적 중요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실로 <나니아연대기>를 비롯해서, 동기간의 모험담을 다룬 이야기들은 모두가 나치 독일의 폭격을 피해 도시에서 아동 소개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첼의 논적 가운데 한 명은 유명한 여성주의자 페이트먼이었다. 페이트먼은 서양의 근대를 정초한 자유, 평등, 우애 가운데 우애=형제애가 본질적으로 가부장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첼은 서양 사회의 토대인 사회적 형제애가 남성 지배적이긴 하지만 수직적인 가부장제는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리고는 동기간 가운데 남자 동기간인 형제 관계가 아니라 동기간 그 자체, 측면적 관계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관계적 자원으로서 말이다. 미첼은 집단심리학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중심축으로 두는 수직적 집단 구성 원리보다는 오히려 동기간과 또래집단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미첼에 따르면, 동기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 상대적 독립성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매우 새롭고도 탁월한, 어쩌면 우리에게 절실한 이론적 착상이다. 하지만 이를 한국 사회에 적용하려고 할 때 한 가지 난점이 생긴다. 즉 한국 사회에서 성인들의 관계적 자원으로 애용되고 있는 형제자매 관계는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그리고 서양의 경우와는 달리- 반드시 수평적이지만은 않다. 측면적 관계이긴 하지만 꼭 수평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친밀하면서도 수직적이다. “형님”하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조폭들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성인들의 삶에서 확실히 그러하다.
 
이러한 난점에 대해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에서 역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동기간의 관계가 훨씬 더 광범위하게 문제적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이를 따지는 문화도 그렇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생각하는 곳에서는 구태여 나이를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나이 차이가 적을 때 우리는 나이를 물어본다. 이삼십 년 나이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두 살 나이차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나이차라면 분명 동기간의 나이차다. 그리고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은 수평적인 관계를 꽃피울 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나이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의 문제만이 아니라 문제의 일반성을 다루려고 할 때- 미첼이 직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회적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개인 생활의 민주화”
한두 살 나이차로도 형 아우를 따져야 하는 곳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시 친구나 동료다. 알다시피 근대적인 학교는 동일한 연령의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가르친다. 그래서 학령기부터 아이들은 주로 같은 나이의 또래관계만을 대량으로 경험한다. 반면에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같은 이유에서 상황이 극적으로 역전된다. 성인들은 한두 살 나이차도 구별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별 습관은 학교의 연령별 제도와 무관할까?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살 차이로 학년이 달라지기에, 성인이 되어도 그렇게 구별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미시적으로 나이를 구분해야 하기에 성인들의 삶에서 친구를 새로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통계적으로 극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같은 나이의 아이들과만 친구 관계를 형성한다. 실로, 단조롭고도 메마르다. 그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도 같은 나이여야 하기에 친구 찾기기 힘들다. 역시, 메마르다. 메마르기에 우리는 인간관계를 마음껏 향유하기가 구조적으로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건 또 왜일까?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불행은 평등한 인간관계의 결핍이다. 정치적 성취가 생활에 반영되지 않는다. 삶은 여전히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정치가 우리에게 맞보게 해주는 민주주의는 한 표의 투표권 행사에 불과하다. 그 한 표의 행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위계적 관계 속에서, 혹은 수직적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 안에 있는 패배주의를, 어떤 뿌리 깊은 패배주의를 설명한다. 이미 우리의 “문화”가 되어 있는 그 무엇을. 우리가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패배주의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울함을 감춘 약간의 자신감으로- “문화적 차이”나 “한국적 문화”를 운운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를 영국의 사회학자 기든스는 공적 영역의 민주화, 즉 정치적 민주화와 대비하여, 하지만 그것을 참조하여, “개인 생활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기든스는 이 개인 생활 가운데서도 특히 성과 사랑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는 적어도 그가 속한 문명인 서양에서, 혹은 그의 나라인 영국에서, 성과 사랑의 영역에 개인 생활의 민주화가 도래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는 사적인 남녀관계만이 아니라 공사를 막론하고 인간관계 전반에서 “문명 속의 불만”(프로이트)을 겪고 있다.
 
이와 같은 불만을 푸는 잘 알려진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저항”이라고 부른다. 정치적 저항. 우리에게 정치적 민주화를 가져다준 바로 그 원동력. 어쩌면 우리는 역사-문화적으로 이 방법 말고는 아는 게 아직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진단과 알려진 해결책 사이에는 큰 괴리가, 원리상의 간극이 있다. 한편으로 정치적 저항은 거시적이고 공적인 문제에 대한 성공적인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성공 이후를 살고 있으며, 그 성공의 결과를 살고 있다.
 
알다시피 오늘날 성공의 결과는 가족 안에서건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건 다양한 미시적 파열들과 실존적 불만들을 내포한다. 그래서 민주화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 다만 이런저런 해악을 가져왔다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해악이라고 가정되는 미시적 문제들이야말로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직면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떠맡아야 하는 새로운 문제를 다만 사회병리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고 “개인 생활의 민주화”라고 명명한 기든스의 작업은 명예로운 작업이며, 칭송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파는 미시적 문제들의 파열 지점을 틀어막는 제스처를 통해 정치적 장을 단 1%면 이미 충분한 차이를 가지고서 효율적으로 장악한다. 이미 공동체가 그 미시적 파열의 떨림을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 공동체의 불안을 이용하면서 말이다. 공동체가 불안을 느낄 때, 그 불안의 증폭기 역할을 하는 정치적 저항은 좌파의 무기로 내내 가정되지만 실제로는 우파의 가장 강력하고도 소중한 무기다. 오늘날 정치적 저항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사적인 것의 자리를 공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착오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퇴행, 그리고 선악을 넘어서
우리는 간혹 방송에서 외국인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예전에 외국인 여자들이 출연하는 <미녀들의 수다>가 있었고, 요즘은 외국인 남자들이 출연하는 <비정상회담>이 있다. 알다시피 출연진의 다수는 백인들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한국인의 나르시시즘에 호소한다. 이런 프로그램에 사회를 맡아 출연하는 한국인 개그맨은 이른바 ‘한국 문화’의 수호자들이다. 그 ‘한국 문화’가 아무리 문제적인 것이어도 개그맨의 희극적 수완이 그 문제를 완화시키거나 무화시킨다.
 
본래 ‘문화’라는 말은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지 특수성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한국 문화’라는 말도 한국인의 어떤 구체적 삶의 방식에 무언가 보편적인 것이 있을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수긍이 가는 것일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한국 문화’니까 그냥 이해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도 한국인이지만, 매번 나이를 따지고 한 살이라도 차이가 나면 형 아우를 따지는 관습에 어떤 문화적인 게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물론 나는 친족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다 자란 성인들의 사회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 간에 서열을 정해주는 데는 문화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에 그러한 서열을 도입하는 데는 아무런 문화적인 것도 없다. 오히려 거기서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것은 문화의 결핍이다.
 
이러한 결핍과 관련하여 처음에 제기된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즉, 왜 선악의 문제만 있질 않고 문제의 일반성도 있는 것일까? 왜 좋은 선배/형과 나쁜 선배/형을 판단하는 문제만 있는 게 아니라 선후배/형 아우 관계 일반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아이들의 세계와 성인들의 세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세계는 주로 가족이나 학교다. 어른들의 세계에는 직장이 포함된다. 이 두 세계를 편의상 제1세계와 제2세계라고 불러보자.
 
형 아우 관계나 선후배 관계는 그 관계들의 본래적 자리인 제1세계에서는 선악의 문제만을 낳는다. 그곳에서는 나쁜 형이나 선배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 관계 자체가 문제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가족이나 학교에서 형 아우 관계나 선후배 관계는 정확한 문화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관계가 제2세계로까지 연장될 때 발생한다. 즉 성인들의 관계에서 여전히 제1세계의 관계와 호칭을 유지하려고 할 때, 우리는 선악의 문제와 문제의 일반성 양쪽 모두와 직면해야 한다. 좋을 때, 그건 다만 선악의 문제일 수 있다. 나쁠 때, 문제의 일반성이 우리 마음속에 점점 더 머리를 내밀며, 한국인의 관계-문화적 결핍이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이렇듯 한편으로 보자면 이것은 제1세계가 제2세계를 침범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2세계가 제1세계로 퇴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와 같은 퇴행의 결과를 잠정적으로 “사회적 증상”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사회적 증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문화=문명과 연동시켜야 한다. 제1세계는 아이들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측면적이거나(동기간, 또래관계) 수직적인(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공동체적 문화가 있거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제2세계는 독립한 성인들의 인간관계를 조율하고 그들이 그 관계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평등주의적 문화가 있거나 있어야 한다. 평등주의는 서양으로부터 온 외래적인 이념이기 이전에 성인들의 독립성 그 자체가 문명 속에서 언제나 요청해왔던 무엇이다. 이 후자의 문화를 “제2문화”라고 부르기로 하자.
 
제2세계가 제1세계로 퇴행하는 것은 제2문화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거나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몰기능이나 부재가 바로 사회적 증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간단한 결론 같아도, ‘문명 속의 불만’은 새로운 문명=문화를 발명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예로 든 의사는 서울의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낙향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경험을 한 후에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민을 생각할 때 그건 가령 중국이나 일본이 아닐 것이다. 아마 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인 서양의 어느 나라일 것이다. 이는 달리 생각해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그것을 문화의 문제로 -의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관계적 문화를 발명하고 실험하는 데는 큰 규모의 집단보다는 작은 규모의 집단이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대학병원보다는 지방의 작은 병원이. 대중이 모인 곳보다는 같은 직업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인간관계 실험들은 기존 관행의 저항을 결코 쉽게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의 관계보다는 어른들의 관계에서 관성은 더 크게 작용한다. 우리는 새로운 관계적 상황이 초래하게 될 당혹감을 쉽게 극복하기 힘들다. 특히 인간관계가 이미 선후배 관계나 형 아우 관계의 호칭을 수용하고 있을 때, 즉 이미 친밀해졌을 때, 새로운 평등주의적 호칭을 도입하는 일은 -특히, 동성 간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인의 수직적 문화가 잘 없어지지 않는 데는 언어가 작용한다. 선후배나 형 아우 호칭은 수직적 호칭이면서도 또한 친밀성을 내포하는 호칭이다. 어른이 된 사람들도 삭막한 사회생활에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친밀성에 대한 요구가 평등주의에 대한 요구를 앞서는 한, 수직적 관계 구조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친밀성에 대한 요구가 우리에게 퇴행적인 작은 피난처만을 제공하고 있는 오늘날, 문화=문명이 요구하는 과제를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니체와는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선악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그곳이 우리가 새로 개척해야 할 모험의 장소다.
 
글·이성민
서울시립대 대학원 철학 전공. 도서출판 b 기획위원. 저서로는 <사랑과 연합>, <권태>(공저), <라캉과 지젝>(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라캉의 주체>,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 등 다수가 있다.
 
(1) 변진경, ‘가난한 집 아이는 동생도 없다’, <시사IN> 2014년 4월 8일,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819
(2) 줄리엣 미첼, <동기간: 성과 폭력>,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14년
(3) 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 배은경?황정미 옮김, 새물결, 2003년, 273쪽
(4) 나는 이 두 세계의 구분과 관련하여 전자의 세계를 “공동체”라고 부르고 후자의 세계를 “연합”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을 해왔다. 이성민, <사랑과 연합>, 도서출판b, 2011년
(5) ‘나는 문화와 문명을 구별하는 것을 경멸한다’,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2003년, 168쪽
(6) 사극을 보다보면 예전에 조선의 양반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호칭에서부터 서로를 얼마나 평등하게 대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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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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