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영지 기자] 남편이 아닌 타인의 정자로 인공수정을 해 태어난 자녀를 남편의 친자식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대법원이 공개변론을 열어 경청하는 자리를 가졌다. 소송 당사자들과 가족법 전문가들은 기존 친생추정를 ‘고수할지’, ‘예외를 넓게 봐야 할지’에 대해 뜨거운 공방을 벌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2일 오후 2시부터 아버지인 A씨가 자녀 둘을 상대로 낸 친생자관계 부존재확인소송 상고심의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A씨는 이미 친자로 출생신고한 자녀들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친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1,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이날 A씨 측은 “친생자 추정 관련법인 민법 844조는 이혼율이 낮았고 이혼 후 재혼도 흔치 않았던 당시 사회적, 법률적 배경에 근거한 것이고 정조를 전제로 한 혼인관계로 추정되도록 제정된 것”이라며 “판례 역시 1980년대에 혈연을 부정할만한 외관은 동거관계의 결여뿐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학기술 발달로 친자관계여부를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고 기존 법리를 획일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불합리적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제3자의 정자를 이용한 인공수정으로 자녀가 태어나면 친생자가 아니기 때문에 양자로 인정해야 한다”며 “아버지와 자녀의 혈연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은 명백하고 혼인관계 파탄 및 자녀들과 아버지의 정서적, 유대관계 단절이 초래되면 법적인 효력이 미치지 않아야 한다고봐야 하고, 판례가 변경되거나 판례해석도 바뀌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자녀 측 대리인은 “남편이 제3자 정자를 제공받는 것을 동의하는 것이 친생자임을 승인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 자체가 부존재확인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논거가 될 수 있다”며 “민법은 친생추정 및 부인제도를 혈연관계가 아닌 자녀 지위보호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생물학적 관계를 밝히는 게 요원하지 않지만 법률영역은 별개”라고 반박했다.
또 “친생 추정 및 부인은 혼인 및 가족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제도”라며 “원고 주장대로 예외를 허용할 경우 따르는 파급효과를 고려해야하고, 현실적 측면에서 공감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관계법령 정비없이 친생자 부존재 확인소가 진행되면 향후 자녀들의 사회생활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날 법정에는 가족법 전문가들이 나와 법관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기회도 있었다. 원고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차선자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버지의 친생 부인 기회를 상실시키는 것은 자식이 생부에 대한 알 권리와 진실된 친자관계를 형성할 기회까지 단절시킨다"며 "친자관계부존재확인 소송을 통해 친생 부인을 인정하는 유연한 대처를 하는 것이 자식의 복리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피고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현소혜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제3자 정자 인공수정을 동의한 부모가 출생한 자녀에 대해 친생부인이나 친생자관계존부확인 소송을 내는 것은 '선행된 발언에 모순되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금반언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며 "오히려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하는 현행 판결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사회단체들이 서면을 통해 각 의견을 제시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태어난 자녀를 불안정한 상태에 두는 것은 자녀의 복리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친생추정 제도의 근간을 유지할 필요는 있다”면서도 “사회상의 변화, 친생추정 제도의 문제점 등에 비춰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할 필요가 있고, 그 범위는 과학적 방법으로 혈연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이 명백하게 확인된 경우로 한정함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반면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제3자 인공수정시술은 원칙적으로 법률상 부부만을 대상으로 하며, 시술 부모에게 출생아가 친자와 동일시돼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권자의 서명을 받은 동의서를 보존하도록 하고 있다”며 “태어난 아기가 안정된 환경에서 양육될 것이라는 신뢰가 중요하므로 판례 변경에는 부정적”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A씨 부부는 A씨가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자 1993년 제3자 정자 인공수정으로 첫째 아이를 낳았고 두 사람의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했다. 이후 1997년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무정자증이 치유된 것으로 착각한 A씨가 이번에도 부부의 친자식으로 출생신고를 마쳤다. 그러나 2014년 가정불화로 아내와 이혼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 둘째 아이가 혼외 관계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A씨는 두 자녀를 상대로 친자식이 아니라며 소송을 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2월 대법원에서 열린 타인명의 부동산등기 소유권과 관련해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을 진행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최영지 기자 yj1130@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