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청년 제이슨 헌터는 어머니 장례식장에 온 동네 사람들에게서 어머니의 포옹이 위로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2001년부터 프리허그닷컴을 만들어 길거리에서 그냥 안아주는 행위를 한다. 허그(hug)라는 단어가 위로한다는 뜻의 노르웨이어 휘가(hygga)에서 왔을 정도니 허그, 즉 포옹은 위로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포옹을 하면 위로가 될까? 궁금하면 해보는 게 과학자다. 200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심리학 연구팀이 단순한 실험을 했다. 성인 커플 100쌍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각 커플에게 최근 받은 스트레스에 대해 이야기하게 했다. 이때 A그룹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포옹을 하게 했고, B그룹은 그냥 이야기만 하게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마친 후 혈압과 심장박동을 측정했다. 결과는 기대한 대로였다. A그룹보다 B그룹의 혈압이 높았고 심장박동은 더 빨랐다. 원인은 한 가지. 바로 호르몬 때문이다. 포옹을 한 그룹은 옥시토신 분비가 높았고 이야기만 나눈 그룹은 코르티솔 분비가 많았다.
포옹을 한 그룹에서 높게 나온 옥시토신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자궁 수축 호르몬’으로만 배웠다. 실제로 옥시토신은 여성이 아기를 낳을 때 뇌에서 분비되면서 자궁을 수축시켜 아기가 산도를 통해 빠져나오게 돕는다. 그리고 아기를 출산한 산모의 젖 분비를 돕는 역할을 한다. 엄마가 아기에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엄마의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호르몬이 바로 옥시토신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옥시토신은 일명 ‘사랑의 호르몬’으로 통한다(6~12개월 동안이나 배에서 맨살을 부대끼며 새끼를 키우는 어미 캥거루의 옥시토신 농도가 궁금하다).
출산과 수유 과정이 아닐 때도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키스와 포옹을 할 때 옥시토신 분비가 많아진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혹시 옥시토신 분비가 많아져서 키스와 포옹 같은 진한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실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쥐의 뇌에 옥시토신을 주사한 후 쥐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실험의 결과 역시 기대한 대로였다. 옥시토신을 주사 받은 쥐들의 애정 행위 정도가 높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르몬의 지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까? 이것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다. 포옹하면 옥시토신이 높아지고 또 반대로 옥시토신이 높아지면 포옹을 하게 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마음이 동하면 안게 된다. 또 안고 있다 보면 사랑의 감정이 치솟는 것은 누구나 경험한 사실이다.
각 호르몬의 기능은 한 가지가 아니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코르티솔도 마찬가지다. 코르티솔은 흔히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통한다. 신경계를 흥분시켜서 혈압을 올리고 호흡을 가쁘게 만든다. 스트레스 쌓이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코르티솔이 분비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연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코르티솔이 나와야 상한 몸과 마음이 회복된다. 코르티솔이 나오는 상황을 막아야지 분비된 코르티솔을 미워하면 안 되는 거다.
옥시토신은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하고 통증을 줄이며 긴장을 푸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랑을 하면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이 분비되면 위로가 된다. 즉 위로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안아주는 거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을 다 어떻게 안아주겠는가? 적어도 사랑을 느끼게 하는 말을 건네자. 그것이면 족하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경기도 안양의 인덕원 고등학교에서 강연했다. 18일 동안 사막 탐사를 다녀온 직후라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다. 강연하는 내내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몸 상태가 점점 좋아졌다. 요즘 고등학생들답지 않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지한 질문에 답하면서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학생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나는 이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어떻게 인덕원 고등학교 학생들은 이렇게 따뜻한 것인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학교를 나오면서 깨달았다. 학교 정문 위에는 교정 쪽에서만 보이는 가로로 기다란 전광판이 있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고했어, 오늘도!’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학교 정문이라니…. 순간 옆에 있던 아이들을 왈칵 안아주고 싶었다. 참느라 힘들었다. 아이들은 학교를 나설 때마다 선생님의 포옹을 받는 기분이 아닐까? 나도 인덕원 고등학교를 다녔으면 훌륭하게 자랐을 것 같다. 오늘 한 명이라도 안아주자.
인덕원 고등학교 정문 전광판. 사진/필자 제공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penguin1004@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