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은 왜 이 사람의 작품을 유독 좋아할까

(인터뷰)'숯의 연금술사' 박선기 작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이감'"

입력 : 2021-01-20 오전 4:11:18
[뉴스토마토 백주아 기자] 국내외 공항, 호텔, 백화점, 쇼핑몰, 리조트 등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다양한 미술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삼성, LG, 현대, 신세계, 롯데, 한화 등 굴지의 기업이 소장 중인 작품 가운데 '대형 조각과 설치 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박선기 작가의 작품이 빠지지 않는다. 
 
미래 가치를 보고 투자하는 기업들이 박선기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시지각적 융통성'을 추구하는 그의 작품은 관객이 작품에 직접 참여하게 하는 '끌림'이 있다. 박선기의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은 작품을 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며 스스로 작품 속에 녹아든다. 자신이 작품의 일부가 돼 작품을 구성하고, 완성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 조각에서 나아가 천장에 숯·아크릴 비즈 등을 나일론 줄에 매다는 형태의 작품으로 자신만의 심벌을 구축해온 박선기가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소재는 거울과 빛이다. 오는 20일 막을 내리는 대구 인당아트홀 개인전에서 공간(Space)을 주제로 선보인 6개의 작품을 보면, 작가의 작품 세계가 한층 확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기하학적 형태의 공간에서 느끼는 진공 체험, 큐브 형태의 거울 발광다이오드(LED) 상자를 쌓아 나열한 방 등을 거닐면서 가상과 실제, 평면과 입체의 혼동 등 다양한 착시와 새로운 경험할 수 있다.  
 
박선기 작가는 중앙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국립미술원에서 유학했다. 서울, 취리히, 로스엔젤레스, 베이징, 코르도바, 리스본, 마드리드, 포르투갈, 베를린, 밀라노, 로디, 로마, 나폴리 등지에서 32회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지난 2006년 제9회 김종영 조각상을 수상했다. 사진/박선기스튜디오 
 
약 3개월간 진행된 개인전 여정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전시 주제를 '공간'으로 잡은 이유는 
설치 미술은 기본적으로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은 물리학적 공간이든, 마음속 공간이든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 한층 복잡해진다. 명확히 정의를 내리긴 어려운 공간을 이해하기보다는 '제시'하려고 했다. 깊이와 평, 평면과 입체, 그림자와 허상, 그리고 필연적인 빛 등을 제시하고 표현하고 싶었다. 일반 작품과 달리 설치 미술은 크기에 제한이 없다. 관객들이 왔다 갔다 움직이며 작품 속에 들어가 체험하고, 안에서 볼 때와 바깥에서 볼 때의 다른 공간적 느낌을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품명: 집합체(An Aggregate 08-01). 서울 서초동 삼성물산 사옥 실내 위치. 수많은 숯 조각들을 투명한 나일론 줄로 공중에 매달아 기하학적 형태의 구조물을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작품은 공간에 떠있는 숯들이 서로 겹쳐져 수묵 산수화 같기도 하고, 공간에 떠 있는 흑백 드로잉을 연상케 한다. 사진/박선기스튜디오
 
박선기하면 필연 떠오르는 소재는 바로 숯이다. 전시에서 숯 외에 거울, 빛 다양한 소재가 사용됐다.  
저에 대한 확고한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의 형태나 혹은 어떤 재료에 빠져 이를 탐닉했었다. 대표적인 재료가 바로 숯인데, 불에 탄 나무의 진흔인 숯은 그 자체로 에너지원이다. 숯을 공간에 매달아 동서양의 정서를 넘나드는 작업을 오래 해왔다. 숯을 소재로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영 등을 주제로 관계를 끊임없이 고찰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숯을 다르게 활용해 입체를 평면화 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시도 중이다. 
숯 외에 요즘 가장 끌리는 소재는 바로 거울이다. 약 10년 전부터 생각을 했지만, 작업을 시작한 지는 5년 정도 됐다. 아크릴 거울이나 실제 거울 등을 이용한 작품 구상을 많이 한다. 빛의 반사나 반짝이는 소재에도 관심이 많다. 작가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좋은 작가는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려고 애쓰는 중이다. 
 
작품명: 집합체(An Aggregation, 130121 ). 서울 호텔신라 로비 위치. 수만 개의 아크릴 비즈를 나일론 줄에 꿰어 공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신라호텔과 박선기 작가와의 협업은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작품을 교체해 해마다 새로운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사진/박선기스튜디오
 
또 다른 심벌은 바로 '매다는 작업'이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개인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어떻게 개성 있게 표현할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작품을 깊이 있게 끌고 가려면 생각을 깊이 있게 끌고 가야 하는데, 이때 철학자적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동사'를 사용했다. 사람들이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동사가 따르기 때문이다. 미술은 시지각으로 어떤 것을 표현해서 보여줘야 하는데, 보이는 방법을 생각했다. 예를 들어 '놓는다', '걸다', '묻는다', '기대다' 등 다양한 동사를 생각하던 와중에 '매달다'는 것을 해보게 됐다. 매달아 놓으니 썩 괜찮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약 20년을 넘게 매달다 보니 이게 내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보더라.  
 
작품명: 집합체(An Aggregation, 190707) 인천공항 제1 여객터미널 면세지역 3층 중앙부에 위치.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성이 있는 공항만의 특별함을 두 가지 색의 비즈가 다양한 각도에서 기하학적인 패턴을 통해 어우러지는 모습을 통해 표현했다. 사진/박선기스튜디오
 
국내 기업뿐 아니라 해외 작품 수집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새로 준비 중인 작업이 있다면. 
신라호텔 로비에 매달은 설치 작품을 가장 많이 사랑해 주시는 것 같다. 최근에는 안성 스타필드에 커다란 거울 LED 큐브 작품을 설치했다. 또 인천공항 제1 여객 터미널 면세구역 에스컬레이터에 길게 늘어진 설치 작품도 있다. 너무 상업적인 작가로 비칠까 다소 걱정이지만, 기업과 기관들이 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글쎄 사실 잘 모르겠다. 아마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추천을 받았을 텐데(웃음).  
새로 준비 중인 작업에는 현대백화점 여의도지점에 2월 말경 규모가 15m 정도 되는 설치 작품이 들어갈 예정이다. 인천공항에 설치된 매다는 작품의 연작으로, 재료는 금색과 은색 크롬 도금된 재료와 광섬유를 이용했다. 백화점, 호텔, 공항, 리조트 등 각 장소의 특성과 분위기에 맞는 작품을 제작하고자 한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전시 계획과 작품 활동에도 차질이 있을 것 같다. 새 전시 계획은. 
전시가 시작되면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지만, 전시가 끝나면 다음 전시에 대한 의욕과 힘이 생긴다. 지난해 계획했던 것들이 코로나로 대부분 취소가 됐었다. 다만 올해 들어 연기되고 중지됐던 개인전, 그룹전 관련한 연락이 많이 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대만 타이베이 미술관 전시는 올해 10월 정도로 예상한다. 해외 미술관과의 작업을 늘려가려고 준비 중이다. 
 
작품명: 말 조각 설치 작품(Point of View horse Installation) 홍콩 타임스퀘어 광장 위치. 사진/박선기스튜디오
 
작가로서의 삶은 어떤 것인가. 요즘 인생의 어떤 시기를 보내고 있는가.
오랜시간 매일 지난하게 작업을 끌고 가면서 작품을 발전시켜 나가는 중에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작가가 됐다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저절로' 온다.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작품을 하면서 느낀다. 이 때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무게와 같은 그런 게 어깨를 누르기 시작한다.
현재로서는 인생의 한 75% 정도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살면서 굉장히 많은 산을 넘게 된다. 한산 한산 넘으면서 경험이 쌓이고, 더 높은 산을 향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멈춰 내리막길을 걸을 수도 있다. 한정된 시간 속에 살다 보니 반드시 정리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한 단계 한 단계 발전 시켜나가는 노력이 중요한 것 같다. 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깊이감'이다.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작품은 좋아진다.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한다고 본다.  
 
백주아 기자 clockwork@etomato.com 영상 촬영·제작= 김건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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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주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