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주아 기자] 전기차 시대로의 전환이 빨라지면서 완성차 업체들의 배터리 내재화도 본격화하고 있다. 배터리 제조사와의 합작은 물론 소재 업체와의 협력까지 강화하면서 전기차 배터리 자체 조달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자동차 업체들의 배터리 내재화 시점이 예상보다 빨라지면서 전지 제조사들이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독일 완성차 업체 폭스바겐은 벨기에 유미코아와 합작을 통해 전구체와 양극재 공장을 짓기로 했다. 양극재는 리튬이온 배터리 4대 핵심 소재 중 하나로, 배터리 원가의 절반을 차지한다. 전구체는 양극재의 원료다.
폭스바겐-유미코아 배터리 전구체 및 양극재 합작사 설립 추진. 사진/폭스바겐
양사는 2025년부터 연간 20기가와트시(GWh)에서 2030년 160GWh 규모로 양극재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앞서 폭스바겐은 지난 3월 '파워데이'를 열고 배터리 내재화 계획을 밝히고 스웨덴 노스볼트, 중국 궈쉬안 등 전지 제조사와의 협력을 확대해왔다. 폭스바겐이 배터리 소재 회사와 직접 협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소재사와의 협력 추세는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도 지난 2일 국내
포스코케미칼(003670)과 북미 지역에 하이니켈 양극재 합작 공장 설립 계획을 밝힌 바 있다. GM은 국내 1위 배터리 업체 LG에너지솔루션(분사 전
LG화학(051910))과 배터리 합작사 '얼티엄셀즈'를 운영 중이다. 배터리 제조사는 물론 소재사까지 협력을 확대하며 내재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LG에너지 솔루션과 제너털모터스(GM) 합작사 '얼티엄 셀즈'의 골조 공사 현장. 사진/GM
자동차 업체들의 배터리 내재화 경향은 테슬라의 배터리 수급 전략에서 비롯됐다. 글로벌 전기차 선두 테슬라는 지난해 9월 배터리 데이 행사를 열고 10년 안에 전기차 배터리 수요의 상당 부분을 직접 조달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후 폭스바겐과 제너럴모터스(GM)과 포드, 도요타, 현대차에 이르기까지 완성차 업체의 내재화 바람은 거세지고 있다. 최근 일본 도요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리튬이온 배터리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상업생산은 2025년부터로, 한화 15조원을 투자해 연간 전기차 80만대 분량의 배터리를 생산할 계획이다.
이처럼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내재화에 '진심'인 이유는 배터리 공급 부족 우려 때문이다. 전기차로의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자체 생산으로 자동차 생산원가의 40% 수준에 이르는 배터리 가격을 낮추고 수급 불안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수요는 올해 330기가와트시(GWh)에서 2030년 4028GWh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에 비해 배터리 공급은 올해 594GWh에서 2030년 3843GWh로 증가해 점차 배터리 수급 불안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배터리 업계는 자동차 회사가 전지를 단독으로 제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있다. 특히 역설계가 안되는 배터리 특성상 자동차 업체가 선도 업체의 특허 기술을 우회해 배터리를 생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당장 배터리 공급 부족에 따른 생산 차질을 겪는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 제조사와 합작사 설립 등의 협력 없이 단기간 내 단독 내재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면서 "선도 기업들이 천문학적 투자를 바탕으로 수십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기술을 1~2년내 따라잡기는 쉽지 않고, 그 기간 동안 전지 제조사의 기술은 한층 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완성차 업체의 내재화 바람이 들불처럼 번지는 시점에서 배터리 제조사의 입지가 축소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박철완 서정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제조사와 합작사 형태를 통해 '사실상 내재화'를 꾸며온 상황이었는데 배터리 연구개발은 물론 활물질 합작사까지 시도하면서 '활물질 내재화'도 꾸미고 있다"면서 "그동안 계속 경고해왔던 배터리 사업 주도권이 배터리 제조사에서 자동차 제작사로 넘어가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업계의 낙관과는 달리 완성차 업체들이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 배터리 제조 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한 이차전지 전문가는 "산업 초기에는 배터리 장비 공정 조차 완성돼 있지 않아 기술 모방이 쉽지 않았지만 20년 전에 비해 양산 안정화로 가는 시간이 훨씬 짧아진 게 사실"이라며 "반도체 등 다른 산업과 비교했을 때 이차전지의 기술 발전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만큼 후발 업체가 선도 업체의 기술력을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 따라잡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백주아 기자 clockwork@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