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그래미 무대 "케이팝과 미국 음악시장 간의 교두보"(종합)

음악 시대 비추는 거울…그래미의 화두 변화와 다양성 쪽으로
팬데믹, 인권 운동, 비영어권…"장벽 점차 낮아져"

입력 : 2021-03-15 오후 5:56:26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음악은 결국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15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제63회 그래미어워즈'는 팬데믹과 'BLM(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으로 대변되는 시대의 '열병'에 주목했다.
 
인권 운동을 주제로 한 공연이 펼쳐지고 시위곡으로 쓰였던 노래가 주요 부문 상을 싹쓸이했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위기에 직면한 미국의 라이브 클럽 신을 집중 조명하며 힘을 실어줬다. 지난해 한 해동안 목숨을 잃은 아티스트들을 추모하며 팬데믹 시기를 돌아보기도 했다.
 
비욘세는 이날 사상 28번째 그래미상 수상으로, 역대 여성 아티스트 가운데 최다 기록을 세웠다. 
 
특히 올해 시상식에선 한국 아티스트들의 영향력도 두드러졌다. 한국계 미국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3수’ 끝에 그래미상을 거머쥐었다. 팝 부문 수상이 불발된 방탄소년단(BTS)은 행사 막바지 한국 대중음악 가수 최초로 단독 무대를 꾸몄다. 
 
그간 남성, 백인, 영어권 편향적이라고 꾸준히 지적받은 그래미의 화두가 변화와 다양성 쪽으로 점차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골고루 흩어진 4대 본상…비욘세 28번째 그래미상 수상
 
지난해 빌리 아일리시에게 4대 '제너럴 필드(본상)'를 몰아줬던 그래미의 파격은 올해는 없었다. 팬데믹 시기, 자신 만의 영역에서 각각의 성취를 이룬 아티스트들에게 고루 상을 부여했다.
 
싱어송라이터 허(H.E.R.)의 'I Can't Breathe'는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며 최대의 이변을 일으켰다.
 
테일러 스위프트 'Cardigan', 두아 리파 'Don't Start Now', 비욘세 'Black Parade', 빌리 아일리시 'Everything I wanted', 포스트 말론 'Circles'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친 결과다.
 
'올해의 노래'는 신인상,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앨범과 함께 그래미 '4대 본상'으로 꼽힌다. 앞서 음악 매체와 전문가들은 비욘세나 아일리시, 리파 등의 수상을 높게 점쳤지만 그래미는 결국 허에게 트로피를 안겼다.
 
더군다나 'I Can't Breathe'는 'BLM'에 관한 노래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사태 때 흑인들의 고통에 대해 노래하는 곡이다. 
 
허는 수상 소감에서 "두려움이 이러한 변화와 영향을 낳을 줄 몰랐다"며 "이것이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라고 했다. "우리는 곧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다. 2020년 여름 동안 우리가 싸웠던 그 에너지를 지키자"며 연대의 힘을 환기시켰다.
 
허(H.E.R). 사진/뉴시스·AP
 
비욘세는 이날 그래미 사상 27번째, 28번째 트로피를 동시에 안았다. 싱글 'Black Parade'로 '베스트 R&B 퍼포먼스'를, 스탤리언과 함께 부른 'Savage'로 '베스트 랩 퍼포먼스'를 각각 수상했다. 역대 28번째 그래미 트로피로, 솔로 부문(성별 통틀어) 최다 기록이다. 그룹까지 포함하면 여성 아티스트 중 최다 기록이다.
 
특히 싱글 'Black Parade'는 지난해 미국 노예제 폐지일을 기념해 발표한 곡이다. 비욘세는 "아티스트로서 저의 역할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어려운 시대였다. 그 어려움을 공유하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본상 중 하나인 '올해의 신인상'도 흑인 여성 래퍼 메건 더 스탤리언에게 돌아갔다. 지난해 'Savage', 'WAP' 등의 메가 히트곡을 발표한 그는 피비 브리저스, 도자 캣 등의 후보를 제치고 수상했다.
 
'올해의 레코드'는 빌리 아일리시의 '에브리싱 아이 원티드'이 선정됐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이 부문을 수상했다. 아일리시는 수상 소감에서 "스탤리언이 이 상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며 "오히려 내가 받은 것이 민망할 정도"라고 추켜세웠다. 
 
올해의 앨범상은 지난해 'Forklore'를 발표한 테일러 스위프트가 가져갔다. 'Fearless', '1989' 에 이어 이 상 수상은 3번째로, 여성 가수로 최다 기록이다.
 
흑인 여성 래퍼 메건 더 스탤리언. 사진/AP·뉴시스
 
팬데믹 위기 집중 조명…흑인 시위 재연 퍼포먼스 눈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에서도 'BLM' 메시지는 두각을 드러냈다.
 
래퍼 릴 베이비는 'The Bigger Picture' 무대에서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사태가 연상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장면이 처음부터 그려졌다. 분노에 찬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장면, 활동가 타미카 말로리가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모습 등을 연출했다.
 
'The Bigger Picture'는 가사적으로도 '광범위한 미국 인종차별에 대한 구조적 문제가 더 큰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음'을 비판한 노래다.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는 "대중음악 탄생부터 음악은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왔다"며 "BLM는 역시 같은 맥락에서 현재 어마어마한 스타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화합과 치유, 사랑과 같은 메시지에 그래미가 주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63회 그래미어워드'에 참석한 테일러 스위프트. 사진/AP·뉴시스
 
올해 시상식은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위기에 직면한 미국의 라이브 클럽 신을 집중 조명하며 힘을 싣기도 했다. 소규모 공연장의 대표부터 바텐더까지, 관계자들에게 시상자의 기회를 주는 파격을 보였다.
 
이날 카메라로 시상식에 모습을 비친 네쉬빌 스테이션 인의 대표는 "조금 더 큰 규모의 공연장을 버틸 수 있었을지 몰라도, 민간이 운영하는 공연장은 파리만 날렸을 정도로 힘든 해였다"고 회상했다.
 
코로나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은 존 프라인을 필두로 지난해 세상을 떠난 팝 거장들의 자취를 조명하기도 했다.
 
에디 반 헤일런, 엔니오 모리꼬네, 케니 로저스, 칙 코리아…. 라이오넬 리치가 케니 로저스의 'Lady'를, 브리트니 하워드와 크리스 마틴이 게리 마스덴의 'You 'll never walk alone' 등의 무대를 꾸몄다.
 
코로나 여파에 예년과는 크게 달라진 시상식 풍경도 이색적이었다. 이날 행사는 무관중으로 열린 대신, 아티스트들이 서로의 관객이 돼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시상식에 착석한 아티스트들은 꽃무늬(테일러 스위프트) 등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마스크를 패션으로도 활용했다.
 
다만 이날 일각에서는 시상식과 관련한 잡음도 일부 나왔다. 
 
주최 측의 불공정성과 폐쇄성을 비판하는 팝 스타들의 보이콧과 축하 공연 불참이 이어진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팝스타 위켄드는 자신의 곡이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그래미 보이콧을 선언했다. 저스틴 비버도 R&B 앨범을 그래미가 팝 장르 후보로 올리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고 비판하며 불참을 선언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위켄드가 후보로 올라가지 못한 것이라든지, 스트록스나 피오나 애플 등 평론계에서 주목하던 가수들이 대거 탈락했다는 점은 일정 부분 이름값에 대해 시상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지적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그럼에도 전반적으로는 'BLM' 등 미국 사회의 현안을 의식적으로 반영하려는 노력이 보였다고 생각한다"고 해석했다.
 
리처드 용재 오닐·BTS…그래미 영향 넓혀가는 한국 음악
 
1958년 시작된 그래미 어워드는 미국 레코드 예술 과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 Science, ‘NARAS’)에서 주최하는 음악상이다. 빌보드 뮤직 어워즈,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와 함께 미국 3대 음악 시상식으로 꼽힌다. 세 시상식 중 음악성 측면에서 가장 큰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이날 한국계 미국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3수’ 끝에 그래미상을 거머쥐었다. 
 
레코딩 아카데미는 그래미 어워즈 사전 시상식(프리미어 세리머니)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한 테오파니디스의 ‘비올라와 챔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베스트 클래시컬 인스트루멘털 솔로’ 부문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용재 오닐이 데이비드 앨런 밀러의 지휘로 알바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곡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이날 공연기획사 크레디아에 보낸 서면 인터뷰에서 “그래미상은 동료 뮤지션들의 신뢰가 담긴 투표”라며 “(그래미상 수상은) 음악계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기에 굉장히 의미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리처드 용재 오닐. 사진/크레디아·뉴시스
 
지난해 11월 방탄소년단 '다이너마이트'는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Best Pop Duo/Group Performance)' 부문 후보로 지명됐으나, 이날 수상은 불발됐다. 레이디 가가·아리아나 그란데의 '레인 온 미'가 이 부문 수상작으로 호명됐다.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는 그래미 팝 장르 세부 시상 분야 중 하나로, 2012년 시상식부터 신설됐다. 듀오 또는 그룹, 협업 형태로 팝 보컬이나 연주 퍼포먼스에서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거둔 음악인에게 수여한다.
 
수상은 불발됐으나 그룹은 이날 행사 말미에 단독 무대를 가졌다. 한국 대중음악 가수 최초다.
 
'그래미 어워드' 상징인 그라모폰(최초의 디스크 축음기) 앞에서 시작된 무대는 가상의 '그래미 어워드' 포토월로, 서울 도심 상공의 헬리패드로 이어졌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는 "올해의 경쟁작이 너무 치열했다"며 "상업과 비평 두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후보들이 수상할 것이란 것은 일견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럼에도 그래미 파이널무대를 장식했다는 것은 상징적"이라며 "선정위원단 의중에 상관없이, BTS가 현재 세계 음악신에서 그만큼 주목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이번 무대는 그간 마이너리티로 평가받던 케이팝과 미국 주류 음악시장 간의 교두보가 설치된 이벤트였다고 본다"고 했다.
 
임진모 평론가는 "BTS는 시상자로, 공연자로 점차 그래미에서의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며 "역사적으로 봐도 자주 출연하는 아티스트에게 그래미는 끝내 상을 수여했다. 내년에는 팝 부문이 아니라 아예 본상 부문으로 이름을 올리길 기대해 본다"고 전망했다.
 
서울에서 '63회 그래미어워즈' 무대를 꾸민 방탄소년단. 사진/빅히트엔터테인먼트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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